<412>쫄딱 쫄딱 ―이상국(1946∼ )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 시감상 2016.09.24
<413>빈 무덤 빈 무덤―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문충성(1938∼ ) 댓잎 바람 소리 봉분들 빈 무덤들 만들었네 시신들 찾지 못해 시뻘겋게 미쳐나 제주 하늘 떠돌다 시커멓게 멍든 혼들아! 50년도 더 지나 고작 눈물 무덤들 지어냈으니 와서 보아라!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나라는 어디에 있.. 시감상 2016.09.23
<414>소만(小滿) 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 시감상 2016.09.22
<415>우체통에게 우체통에게 ―조수옥(1958∼ ) 기다림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 몸속에 아직 차오르지 않는 꽃대의 빈 속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바람의 쓸쓸한 안부를 빈 가슴으로 적셔보는 일입니다 무수한 날이 별똥별처럼 떨어질 때 아직 봉인되지 않는 입술은 부르터 바람.. 시감상 2016.09.21
<416>제4과 제4과 ―김형영(1945∼ ) 제 1과, 끝끝내 덜 된 집 제 2과, 단번에 깨친 듯 거침없는 바람 제 3과, 흥에 겨워 허구한 날 노래하는 나무 이 세 귀신(鬼神) 사이에 끼어보려고 반평생 기웃거리며 살았는데 끝끝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다가 숨 몰아쉬기도 힘든 그날이 다가와 한숨 한 번 몰아서 .. 시감상 2016.09.18
<417>아아 아아, ―박소란(1981∼ )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 시감상 2016.09.16
<418>물의 결 물의 결 ―박우담(1957∼ ) 1 너는 노를 젓고 있다 물을 노크하고 있다 너는 물을 벗겨내고 있다 노를 저어 물의 척추를 간질이고 있다 척추는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입에 재갈을 물린 듯한 템포 빠른 호흡을 하고 있다 너는 노를 젓고 있다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아갈 방향으로 결을 따.. 시감상 2016.09.12
<419>납작 납작 ―정다운(1977∼ ) 은퇴한 아버지는 유명 카페 가맹점을 냈다 커다랗고 똑같은 간판이 싫단다 하지만 아무도 간판 보고 찾아오지 않는다 지도앱을 이용하지 어쩌다 한 번 이메일을 받았다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어도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는 말 널 치면 네가 다니는 회사 네가 먹은.. 시감상 2016.09.10
<420>철거 철거 ―김록(1968∼ )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 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시감상 2016.09.09
<421>우리 아들 최감독 우리 아들 최 감독 ―최형태(1952∼ ) 전공인 영화를 접은 둘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바리스타에 입문하였다 졸업 작품으로 단편영화를 찍고 개막작으로 뽑히고 하길래 영화감독 아들 하나 두나 보다 했는데 영화판에는 나서볼 엄두도 못 내고 여기저기 이력서 내고 면접도 보러 다니고 .. 시감상 2016.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