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눈물 소리 / 이상희 눈물 소리 ​ ​ ​오래 울어보자고 몰래 오르던 대여섯 살 적 지붕 새가 낮게 스치고 운동화 고무창이 타도록 뜨겁던 기와, 검은 비탈에 울음 가득한 작은 몸 눕히고 깍지 낀 두 손 배 위에 얹으면 눈 꼬리 홈 따라 미끄러지는 눈물 소리 들렸다 - 울보야, 또 우니? 아무도 놀리지 .. 시감상 2017.06.03
<9> 낙엽 / 레미 드 구르몽 낙엽 ―레미 드 구르몽(1859∼1915)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 시감상 2017.06.01
<8> 얼어붙은 발 / 문정희 얼어붙은 발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 시감상 2017.05.31
<7> 거룩한 식사 / 황지우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 시감상 2017.05.29
<6> 대구사과 / 상희구 대구사과 인도라는 사과는 최고의 당도에다 씹히는 맛이 하박하박하고 홍옥이라는 사과는 때깔이 뿔꼬 달기는 하지마는 그 맛이 너무 쌔가랍고 국광은 나무로 치마 참나무겉치 열매가 딴딴하고 여문데 첫눈이 니릴 직전꺼정도 은은하게 뿕어 가민서 단맛을 돋꾼다 풋사과가 달기로.. 시감상 2017.05.28
<5> 묵화 / 김종삼 묵화(墨畵)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 ​- 김종삼(1921∼1984) ----------------------------------------------------------------------------- 몇 줄 안 되는 글로 이렇게 여운이 끝없는 울림이라니! 아마 혼자 .. 시감상 2017.05.23
<4> 새들은 / 에밀리 디킨슨 새들은 새들은 네 시- 그들의 여명에- 공간처럼 무수한 대낮처럼 무량한 음악을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소모한 그 힘을 셀 수가 없었다 마치 시냇물이 하나하나 모여 연못을 늘리듯이 그들의 목격자는 없었다 오직 수수한 근면으로 차려입고 아침을 뒤쫓아 오는 사람이 가끔 있을.. 시감상 2017.05.19
<3> 옛 연인들 / 김남조 옛 연인들 ​ ​ 지난 세월 나에겐 시절을 달리하여 연인이 몇 사람 있었고 오늘 그들의 주소는 하늘나라인 이가 많다 기억들 빛바랬어도 그 각각 시퍼렇게 멍이 든 심각성 하나만은 하늘에 닿았고 오늘까지 살아 있으니 그들 저마다 어찌 나의 운명 아닐 것인가 그 시절 여자들은 .. 시감상 2017.05.19
<2> 어느 새벽 처음으로 / 조은 어느 새벽 처음으로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 불안하게 눈을 뜨던 여느 때와 달랐다 내 마음이 어둠 속에 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맡엔 종이와 펜 지난밤 먹으려다 잊은 맑은 미역국 어둠을 더듬느라 지문 남긴 안경과 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 개켜 놓은 옷 방전된 전화기 내 방으로 밀려.. 시감상 2017.05.16
<1> 푸르른 날 / 서정주 푸르른 날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 시감상 2017.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