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마지막 편지 마지막 편지 ―이정록(1964∼) 가지를 많이 드리웠던 햇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무는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던 남쪽으로 몸을 누인다.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나의 북쪽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이제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가지고 .. 시감상 2016.12.16
<285>고쳐 쓰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고쳐 쓰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김점미(1963∼ ) 지금 나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의 통속한 사랑을 읽고 있다 가령, 그녀가 온다면 그곳에서 사랑의 불꽃을 피운다면 새벽녘에 다시 그를 버리고 또는 그에게 버림받고 떠나간다면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는 다시 또 사랑을 시작할 수 .. 시감상 2016.12.15
<296>한복 한복 ―황금찬(1918∼ )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모두 한복을 입는데 나만 한복이 없다고 했더니 병처가 큰맘 써 한 벌 했다. 78년 정월 첫날 아침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 백운대와 도봉이.. 시감상 2016.12.14
<297>맛있었던 것들 맛있었던 것들 ―한영옥(1950∼ ) 실한 풋고추들이 쪼개져 있었다. 쪼개진 풋고추 처음 보여준 사람은 고추전 잘 부치시는 우리 어머니 풋고추 싱그럽게 채반 가득한 꿈이 아침나절 덮어와 어머니 곁에 왔다 함께 기우는 목숨 언저리 햇살 한껏 잡아당겨 서로를 찬찬히 눈여겨두는 나물 그.. 시감상 2016.12.13
<298>늦여름 오후에 늦여름 오후에 -홍신선(1944~ )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 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 시감상 2016.12.10
<299>거울에게 거울에게 -황성희(1972~) 그때 나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제목도 없는 시간 속으로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고 나는 마치 처음부터 빨래 건조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처음부터 엄마엄마 보행기로 거실을 누비는 저 아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처음부터 베란다 너.. 시감상 2016.12.04
<300>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1971∼)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 시감상 2016.12.03
<302>들개신공 들개 신공 ―박태일(1954∼ ) 벅뜨항 산 꼭대기 눈 어제 비가 위에서는 눈으로 왔다 팔월 눈 내릴 땐 멀리 나가는 일은 삼간다 게르 판자촌 가까이 머물며 사람들 반기는 기색 없으면 금방 물러날 줄도 안다 허물어진 절집 담장 아래도 거닐고 갓 만든 어워 둘레도 돈다 혹 돌더미에서 생고.. 시감상 2016.12.02
<303>절 절 ―이홍섭(1965∼)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 시감상 2016.12.01
<304>하늘 하늘 ―박두진(1916∼1998)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 시감상 201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