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꽃 핀 나무 아래 꽃 핀 나무 아래 ―주원익(1980∼ ) 우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어야 했던 관념의 오물들이 관념으로 뒹굴고 있다 흰빛,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것은 때때로 달아나고 미소 짓고 불을 가져온다 강물은 낮을 가로지르고 밤을 위해 잠들었다 돌무더기를 끌고 발자국을 지우며 물소리 들리지 .. 시감상 2016.11.15
<369>우포여자 우포 여자 ―권갑하(1958∼ )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 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잔 본적이 없다 비취빛 그리움마저 개구리밥에 묻어버린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마음도 어쩌지 못할 원시의 촉촉함이여 생살 찢고 솟아오르.. 시감상 2016.11.14
<373>새들은 아직도 새들은 아직도…… ―최영미(1961∼ )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클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 시감상 2016.11.13
<374>물리치료 물리치료 ―이정주(1953∼ ) 여자는 내 어깨 아래 핫백을 밀어 넣는다 나는 데워진다 따뜻하고 어지럽다 여자는 내 어깨에 멘소레담을 바르고 근육들을 만진다 시원하고 아프다 여자는 내 어깨에 전극을 붙이고 스위치를 올린다 찌릿찌릿하고 간지럽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 시감상 2016.11.12
<375>동질(同質) 동질(同質) ―조은(1960∼ ) ​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시감상 2016.11.10
<376>바람에게 바람에게 ―김지하(1941∼ )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 시감상 2016.11.09
<377>송가(送歌) 송가(送歌) ―이재무(1958∼) 모두들 그렇게 떠났다 눈결에 눈물꽃송이 몇 개 띄운 채 입으론 쓸쓸히 웃으면서 즐거웠노라고 차마 잊을 순 없겠다는 말 바늘 끝 되어 귓속 아프게 하고 인연의 매듭 풀면서 가늘게 떠는 어깨 두어 번 두드리고 떠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아도 .. 시감상 2016.11.08
<378>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김혜순(1955∼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 시감상 2016.11.07
<379>생각의 사이 생각의 사이 ―김광규(1941∼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 시감상 2016.11.06
<380>꽃보자기 꽃 보자기 ―이준관(1949∼ )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 시감상 2016.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