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376>바람에게

시온백향목 2016. 11. 9. 21:10

바람에게 김지하(1941)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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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해서 반공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1970년 이후에도 김지하 선생은 독재정권과 부패권력에 대한 거침없는 폭로와 풍자로 1980년에 형() 집행정지가 되기까지 도피와 투옥과 고문과 사형선고와 무기징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 반체제 저항시인의 가히 전설 같은 삶은 이제 전설처럼 멀게 느껴지는 그 시대, 그리고 문학인의 시대에 대한 책무를 돌아보게 한다.

모든 죽어간 것, 죽어서도 살아 떠도는 것, 살아서도 죽어 고통 받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진혼곡’, 이 시를 옮긴 시집 애린에 시인은 이리 글을 붙였다. 글 끝에 시인의 육필로 인쇄된 ‘198629/해남에서/김지하가 시에 어른거린다. 1986, 시인 나이 45. ‘내게서 이제/다 떠나갔네/옛날도 훗날도/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세상 풍파 그럭저럭 잦아들어 시인의 고난도 책무도 홀가분하게 벗어던졌네. 이런 날을 애타게 바랐건만, 그래서 더이상 바랄 것없다고 되뇌건만, 왠지 쓸쓸하고 허무하다. 시인은 제 삶을 춘란 뽑혀/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이라 느낀다. 생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상징할 춘란’. 그것을 잃고 못생긴 여뀌닢으로 잔뜩/비틀어져 내 다시 났단다. 일상의 범속함에 대한 환멸 속에서 시인은 자기를 추스른다. ‘바람아/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새 햇살로 흔들려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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