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맨발 맨발 ―문태준(1970∼ )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 시감상 2016.11.29
<359>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1901~1989)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 시감상 2016.11.27
<360>발베개 발베개 ―정충화(1959∼ ) 종각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보았다 잠에서 깨지 않은 어느 노숙자의 한쪽 다리가 천장을 향해 들려 있는 것을 치켜진 무릎 끝이 뭉툭 잘려 있는 것을 잘린 무릎의 드러난 살갗으로 햇살에 비친 유빙(遊氷)처럼 푸른 빛이 내려앉아 그를 깨우고 있었다 사라진 발은 .. 시감상 2016.11.25
<361>대물림 대물림 ―편덕환(1937∼ ) 연꽃이 떨어지고 나면 연 밭에는 연밥이 가득 꽂혀 있습니다. 나는 쪽배를 요기조기 띄워가며 연밥을 따지요 올해는 예년에 비해 풍년이 들어 많이 따게 되었습니다. 아까부터 우리 아버지께서는 정자나무 아래 등의자에 기대인 채 연밥 따는 아들 모습을 쳐다보.. 시감상 2016.11.24
<362>만원을 바라보며 만원을 바라보며 ―임영석(1961∼ )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바라본다 곳곳이 위조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해와 달이 하나뿐이라는 일월오봉도, 반으로 접어보니 해와 달이 한곳에 겹쳐진다 음과 양의 기가 한 곳에 만나 통하는 세상 얼마나 많은 문양을 완성해야 이루어진.. 시감상 2016.11.21
<363>이끼 이끼 ―메리 올리버(1935∼ )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 시감상 2016.11.20
<364>수술전야 수술전야 ―박덕규(1958∼ ) 입원하러 가기 전날 밤 갚아야 할 빚을 다 적어 놓아야겠다고 몰래 스마트폰 빛을 밝히며 책상 앞에 앉았다가 서랍에서 발견한 십 년 전 낙서. 그 시절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리며 배를 움켜쥐고 쓴. 하느님, 제가 일 잘 하는 사람인 줄 알고 빨리 불러 일 시키실 .. 시감상 2016.11.19
<365>소릿길 소릿길 -박진형(1954~) 몸이 마음을 버릴 때 베란다에 내어놓은 두메양귀비 핀다 연노랑 꽃등이 나를 가만 흔들다가 천구백사십년의 리화듕션에게 데려간다 모시나비는 거미줄에 날개 찢긴 채 울고 있다 복각판에서 찍찍 풀려 나오는 저 소리는 우화(羽化)다 소리로 세상을 촘촘히 읽다니 .. 시감상 2016.11.18
<366>몰핑 몰핑 ―김철식(1967∼ ) 해 저무는 저녁이면 강변 송신탑 꼭대기에 오르곤 하지 바람을 거슬러 비껴 오르면 굽이치는 저 강물의 진짜 거처가 어딘지 알 수 있지 허공의 한기(寒氣)도 건드리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체도 만져지지 더 높은 곳이 도심으로 많이도 내려다보이지만 여기는 정상, .. 시감상 2016.11.17
<367>시래기 한 움큼 시래기 한 움큼 ―공광규(1960∼ )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 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 시감상 2016.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