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이정록(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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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많이 드리웠던 햇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무는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던 남쪽으로 몸을 누인다.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나의 북쪽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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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가지고 간다. 그루터기는 데리고 갈 수 없어 비탈에 남겨 놓는다. 멍하니 하늘 한가운데만 올려다볼 나이테, 그 외눈에 오래도록 진물 솟구치리라. 거기부터 썩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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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길 없이는 다시는 싹 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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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연은 이 시를 쓰게 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동네 비탈인지 산비탈에서 화자는 나무가 바싹 베어진 흔적, 그루터기를 본다. 화자가 눈을 돌리지 못할 만큼 커다란 그루터기였을 테다. ‘멍하니 하늘 한가운데만 올려다볼 나이테, 그 외눈에 오래도록 진물 솟구치리라.’ 나이테는 나무의 내부다.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식물도 감춰져 있어야 할 부위가 드러나 있는 건 섬뜩하다. 베어진 지 얼마 안 돼 눈부시게 깨끗한 나무의 속살, 차츰 거뭇해지리라. 물관과 체관이 한동안 부질없이, 애처롭게 작동하리라. 나무를 벤 이, 아니 나무를 베라고 지시한 이는 알까. 그 나무의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알고서도 그러는 걸까. 베어져 나간 나무 그루터기를 우연히 마주친 화자는 그 처연함에 전율하면서 거기 제 모습을 겹친다. 둘째 연의 나무는 쓰러뜨려진 나무인데 첫 연의 나무는 스스로, 아니면 저절로 쓰러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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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쪽으로’ ‘남쪽으로’,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는’ 나무는 화자 자신이다. 그런데 화자는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했다. 화자는 실제 나무가 아니기에 욕동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성과 양식의 냉엄함으로 한없이 졸아들면서도 자꾸 기울어지다가, 견디지 못하여 그 나무 밑동을 제 손으로 싹둑 베어버렸나 보다. 그랬으면서도 화자인 나무는 ‘네 눈길 없이는 다시는 싹 나지 않으리라’고 미련을 보인다. 실제 나무는 그루터기만 남은 뒤에는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싹 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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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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