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1> 푸르른 날 / 서정주

시온백향목 2017. 5. 7. 20:37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19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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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뭉클한 시다. 잊혔던, 닫혔던, 억눌렸던, 그리움의 감정을 덜컥 열어젖히는 시. 논리를 깨부수는 이 그리움의 해방구에서 우리는 가슴이 벅차다가, 벅차다가, 뻥 뚫린다.


닥친 일들, 풀어야 할 문제들, 고된 노동, 이별의 슬픔, 조락의 불안, 잠시 놓아두고 하늘을 보자. 비운 마음을 청명한 눈부심으로 가득 채우자. 인생에 진짜 좋은 건 모두 공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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