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414>소만(小滿)

시온백향목 2016. 9. 22. 16:30

소만(小滿) 윤한로(1956)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보리 이삭 누렇게 익고 초목이 무럭무럭 자라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다. ‘봄 끝물’, 여름 맏물. ‘베란다 볕도 좋아 미카엘라/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정답게 세례명을 부르는 걸 보니 미카엘라는 화자의 누이 같은 아내, ‘아버지의 딸 같은 며느리.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아버지 , 좋아라 애기처럼웃으신단다. 육신도 정신도 애기가 된 연로하신 아버지,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몸을 씻는 게 영 내키지 않으셨을 테다. 그래 목욕하시자 할 때면 버럭 화를 내며 땡깡을 부리셨을 테다. 욕실에 모시는 일이 전쟁이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볕 좋은 베란다에서 애기처럼’ ‘윤 교장선생, ‘따슨 물에 몸 담그고 잠방잠방 물장난도 하며 웃으시네요. 미카엘라는 소만의 햇볕, ‘따슨어머니의 손길로 노인의 몸을 어루만져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유일하게 남은 찬사가 깔끔하다일 날이 오리니. 방과 몸에서 나쁜 냄새라도 풍기면 가족의 천대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노인이 많다. 노인이 되면 여태 주인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이제 세입자가 된 듯 입지가 불안해진다. 그렇잖아도 어디에서고 존재감이 엷어지는데 가족조차 그가 없는 듯 있기를 원하기 쉽다. 다행히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같이 늙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전 노인들보다 외로움이 덜한 노년을 보낼 테다. 그런데 노인은 외로울 뿐 아니라 신체도 취약하다. 머지않은 그날에 대비해서 무슨 호신술을 연마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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