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417>아아

시온백향목 2016. 9. 16. 15:59

아아, 박소란(1981)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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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마주 걸어오던 청년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장남자 같아.” 같이 찧고 까불던 그의 일행이 일순 조용해지며 아무도 웃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나를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런가? 늙고 살이 찐 뒤 바그너같이 생겨진 것도 같다. 이제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친구들 웃기자고 함부로 대할 만큼 늙은 여자가 된 것인가. 늙은 것은 서럽지만, 서러운 젊음도 있다. 박소란의 시를 읽노라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청춘의 가슴 저린 시간들이 떠오른다.

 

화자는 활달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 환경도 밝지 않은 듯하다. ‘수시로 아아,’ ‘한 줄기 신음인지 한숨인지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온단다. 절망감과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는 것이다.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하는 직장은 호구지책일 뿐 아무 즐거움이 없는 곳, 거의 매일 곧바로 퇴근해서 돌아가는 집도 캄캄하다. 저녁의 긴 그림자를 밟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는, 박소란이 그리는 필경 가난하고 외로운 청춘의 초상에 젊은 여성 독자는 더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한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안간힘으로/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그러니 모두/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주소’).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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