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김록(1968∼ )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 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집을 허물면서
한 집안의 금붙이 동붙이를 팔아먹고
이웃집에 주기로 마음먹은 화분과 장독까지 깨부쉈다
철거 전 영산홍을 파내어 화분에 옮겨 심고
장독들은 깨끗이 닦아 놓았는데
기나긴 세월 무엇을 참고 있었기에
이같이 하찮게 무너질
어진 마음을 모셔 두고 있었을까
집하장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걸릴까
정든 것에 일일이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도저는
한 집안의 위엄을 뭉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다 버리기 위해 또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공터에 다다르면
기중기는 허공의 뼛가루만 들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너진 집을 또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서,
가훈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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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담긴 시집 ‘불세출’은 강렬한 시어로 광기 어리고 난해한 심상을 이끌어 내는 개성적인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김록의 이름에 값한다. ‘네가 타는 그네를 매단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다.’(시 ‘감정 살해자’), 이런 한 줄짜리 시부터 ‘네 뱃가죽에는 십자가 모양의 칼자국이 깊숙하다. (……)./세로로 긴 칼자국은 너를 죽이려고 하는 누군가가 개나 소를 잡는 칼로 너의 배를 길게 베었을 때 생긴 것이다. 가로로 짧은 칼자국은 너를 살리려고 하는 외과의가 메스로 너의 배를 짧게 갈랐을 때 생긴 것이다.(……)/네가 노동가를 위령가처럼 부르니 정말 귀신이 나올 것 같겠다.(……)/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해서 정말 좋은 소식이 오는 줄 알고 너는 기다린다. 네가 기다릴 때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것이다.’(시 ‘누군가는 한다’)처럼 단편소설 길이 시까지 분량도 들쭉날쭉한데, 저마다 쏠리면 쏠리는 대로 젖히면 젖히는 대로 탄탄히 균형을 잡고 있다. 허무와 퇴폐라는 잡목더미로 지어놓은 엄격할 정도로 명징한 의식의 집이라고 할까. 읽어봐야 맛을 알 테니 일독을 권한다.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기나긴 세월’ 살아온 한 생명의 갓 베어나간 자리, 하얀 그루터기에 오줌을 ‘갈기는’ 무례하고 잔인함이여. 실제 그랬을 ‘철거 인부’는 ‘존재의 위엄’을 모독하는 모든 무뢰한의 알레고리이다.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의 날 선 미감과 얽힌 도덕적 보수성이 엿보인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