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연인 ―폴 엘뤼아르(1895∼1952)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그녀는 내 손의 모양을 가졌다, 그녀는 내 눈의 빛깔을 가졌다,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삼켜진다.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처럼. 그녀는 눈을 언제나 뜨고 있어 나를 잠자지 못하게 한다... 시감상 2016.09.07
서귀포 오일장에서 서귀포 오일장에서 ―김지윤(1980∼ ) 매일 비워졌다 또 밀물 차오르는 모래톱처럼 닷새마다 꼬박꼬박 열리는 오일장 가을감자 파는 좌판 할머니 앞에서 한 푼, 두 푼 버릇처럼 감자 값을 깎다 하영 주쿠다(많이 줄게요), 하며 감자 자루 내미는 부르튼 손 검은 흙 낀 손톱 보며 할머니 텃밭 .. 시감상 2016.09.06
등대 등대 ―김선굉(1952∼ ) 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 시감상 2016.09.04
자연에게서 배운 것 자연에게서 배운 것 여기 전에 알지 못하던 어떤 분명하고 성스런 약이 있어 오직 감각뿐이던 내게 분별력이 생겨 신이 그러하듯 사려 깊고 신중해진다. 전에는 듣지 못하던 귀와 보지 못하던 눈에 이제는 들리고 보인다. 세월을 살던 내가 순간을 살고 배운 말만 알던 내가 이제는 진리를.. 시감상 2016.09.03
산에가는이유, 의역사 산에가는이유,의역사 ―박의상(1943∼) 산에 갔지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다음엔 바위를 보러 갔고 언제부턴가 무덤을 보러 갔지 그리고 오늘부터는 저것들 보자고 산에 가지 산 아래 멀리 저어기 강가의 새 도시에 우뚝 선 것들, 번쩍이고 으르렁대는 세상에, 저 예.. 시감상 2016.09.02
실 실 네가 따르는 한 가닥 실이 있다. 그 실은 변화하는 것들 사이로 지나간다. 하지만 그 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따라가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너는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실을 붙잡고 있는 한 너는 길을 잃지 않는다.. 시감상 2016.09.01
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1962∼ ) 반짝이는 것들에게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어 길을 걷다 보면 늘 온전한 것보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 훨씬 반짝거려 강물이 그렇듯 반짝이는 것도 부서지고 깨진 돌멩이 강바닥에 모여 있기 때문일 거야 떠나온 곳에서 한 발.. 시감상 2016.08.30
벗어놓은 스타킹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1966∼ )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시감상 2016.08.28
사랑 사랑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기에 언제나 새로우며 최상의 호기심으로 배움에 임하지만 결코 지식을 쌓지 않으며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이 없기에 없음이라고 불리며 끝이 없이 깊고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앎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모름이라고 불리며 그의 힘은 무한하나 한없이 부드.. 시감상 2016.08.27
탐구생활 탐구생활 ―이진희(1972∼ ) 나는, 나는 매일 나는 애벌레거나 곤충의 상태인 듯한데 밤이면 짐승이나 꿀 법한 꿈에 시달리면서도 한낮에는 천연덕스럽게 꽃이나 나무의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간신히 성장하는 기분, 도무지 나는 무얼까 어떤 숙제도 제대로 한 적 없는데 어떤 통과의례.. 시감상 201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