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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780]김기춘과 天網/황진선 논설위원/문화일보/2017.01.26

시온백향목 2017. 2. 17. 16:47

 198712월 법조기자실을 찾은 김기춘 법무연수원장에 대한 첫인상은 겸손한 수재형이었다. 그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초안하는 데 참여했고,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냈으며,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인사여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후 그는 필자에게 몇 장면으로 각인돼 있다.


 첫 번째는 임기 2년의 검찰총장직을 마친 뒤 일상의 모습이다.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정장 차림으로 안방에서 서재로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한다고 했다.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공안 검사 출신인 그는 평소 법질서를 강조했는데 그 후 미스터 법질서라는 별명이 굳어졌다. 그 덕인지 총장 퇴임 5개월 만인 19915월 법무부 장관직에 올랐다. 두 번째는 1992년 가을, 유력 대통령 후보이자 고교 선배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의 국회 사무실 앞에서 정치인들과 섞여 면담을 기다리던 모습이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김 대표 사무실은 정치인들로 북적댔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인 그의 등장은 뜨악했다.


 그 연장선일까. 199212초원복국집 사건이 일어났다. 장관에서 퇴직한 지 2개월 만이었다.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며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불구속기소 됐지만 자신에게 적용된 선거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받아내 법기술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거제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6년부터 국회의원을 3차례 지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출범 6개월 만인 20138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권부 핵심이 됐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최순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며 법꾸라지(법 미꾸라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던 표현 그대로 천망(天網), 곧 하늘의 그물을 피하지는 못했다. ‘미스터 법질서에서 법기술자, 법꾸라지,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범법자로 점차 나락에 빠졌다. 후배 공안통 검사장 출신인 고() 김원치 변호사는 저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삶의 기술은 삶의 가치에 복종할 때만 유용하다고 했다. 그가 믿은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삶의 기술이 법의 가치, 삶의 가치, 나아가 공동체의 삶에 기여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저 권력만을 좇던 불나방이었을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