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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633]야후의 퇴장/김회평 논설위원/문화일보/2016.07.27

시온백향목 2016. 8. 20. 13:22

 야후의 위세는 한국에서도 대단했다. 야후코리아는 2000년대 초 80% 점유율로 국내 검색시장을 장악했다. 하루 페이지뷰가 2000만을 찍을 정도였다. 하지만 2012년 말 야후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기 직전 점유율은 고작 0.25%였다. 한국 네티즌에게 야후는 추억 속의 존재로만 남았다


 199420대 스탠퍼드대 대학원생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가 재미 삼아 자주 찾는 웹사이트를 카테고리 형태로 정리한 것이 시작이었다. 스탠퍼드대 서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자 이듬해 야후를 세워 사업에 나선다. 야후는 웹 주소를 일일이 기억해 접속하던 종전의 패턴을 일거에 바꿔놓으면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었다. 1998년 스탠퍼드대 후배들이 창업한 구글은 2000년대 중반 야후를 추월했고, 2004년 출현한 페이스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신무기로 고객을 뺏어갔다. 야후는 2012구글의 여걸마리사 메이어를 영입하는 승부수로 반전을 노렸으나 끝내 기적은 없었다. 야후의 인터넷사업 부문은 며칠 전 미국 1위 통신사 버라이즌에 팔리면서 영광의 시대를 마감했다


 매각 대금은 483000만 달러(55000억 원). 20001월 최고 시가총액 1250억 달러의 4%,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제시한 금액 446억 달러와 비교해도 11%에 불과한 헐값이다. 재기의 미련에 사로잡혀 매각 타이밍을 놓친 귀결이다. 야후는 구글이 스타트업 시절 인수할 기회를 얻었으나 제리 양은 고심 끝에 포기했다. 그 선택이 가져온 대가는 컸다. 야후로서는 아픈 기억들이다


 포털에 다양한 콘텐츠를 꾸려 사용자가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야후 방식이다. 체류시간이 길수록 광고 수익은 올라간다. 구글의 전략은 달랐다. 사용자의 발을 붙들기보다 검색창을 통해 다른 사이트로 연결해주는 데 주력했다. 대신 검색엔진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쪽으로 투자를 집중했다. 여기에 모바일이 대세가 되면서 기존 체제에 묶인 야후로선 활로를 찾기 힘들었다


 과거의 혁신은 새로운 혁신의 제물이 된다. 디지털시대의 영웅 모토로라·노키아·IBM(PC)이 그렇게 스러졌고, 이번에 야후가 새로운 묘비석을 얹었다. 영원한 1위는 없고, 한번 기선을 뺏기면 되돌리기 어렵다. 시장의 경험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