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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631]김향안 탄생 100주년/김종호 논설위원/문화일보/2016.07.22

시온백향목 2016. 8. 18. 14:09

 ‘부디 건강하고, 부디 서둘지 말고, 부디 비굴한 생각 말고, 부디 초조하지 말고, 부디 격()하지 말고, 부디 순간에 취하지 말고, 부디 선악(善惡)에 매섭고-나는 이러한 고국의 부탁을 마음에 되뇌며 샹젤리제 대로를 다시 활보해본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아내로 더 널리 알려진 문필가이자 화가 김향안(19162004)의 수필 파리의 여름일부다.


 수화가 작품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가기 1년 전에 가서 현지 언어를 익힌 그는 수화의 통역사이기도 했다. 방송에서 이런 내용도 통역했다.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르다. 동해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그 물이 들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한다.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고려청자도, 조선백자도 만들 수 있었다.” 하늘이나 바다의 색깔이기도 하고, 그리움의 색깔이기도 한 수화 특유의 점화(點畵)가 장르화한 과정에도 그의 숨결이 뱄다. 지난 628일 경매에서 한국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인 54억 원에 낙찰된 전면 점화 무제 27--72 #228’도 그중 하나임은 물론이다. ‘월하(月下)의 마음등 적잖은 수필집도 낸 그는 흔히 수화를 수화답게 만든 인물로 일컬어진다. 본명은 변동림이다. 첫 결혼은 천재 시인이상과 했다. 이상이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며 남긴 마지막 말 센비키야(1834년 창업한 과일 전문점)의 멜론은 먹고 싶은 것을 물은 그에게 한 대답이다. 이상 요절 7년 후인 1944년에 그는 딸 셋을 둔 수화와 재혼하면서 수화의 어린 시절 이름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그는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작가의 투명하고 격조 높은 조형 언어는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와 성좌(星座)의 영롱함으로 빛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여기 남다.’ 벽에 이렇게도 새겼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내 영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 영혼은 환기의 영혼하고 같이 미술관을 지킬 것이다.” 그곳에서 김향안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지난 325일 개막해 814일까지 계속된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한 구절을 화제로 삼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롯한 수화 그림 400여 점, 주고받은 편지, 재현한 신혼집 수향산방(樹香山房)’ 등을 통해 그 둘의 삶과 예술이 전하는 향기가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