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다/ 불어/ 바람이 분다/ 새로운 바람이 분다/ 바람 불어 좋은 날에 내 꿈도 부풀어 온다.’ 이장호 감독이 최일남 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1980년에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 주제가(김도향 작사·작곡) 한 대목으로 포스터에도 담았던 문구다. 전두환 신군부의 검열이 엄혹했던 당시 민간인으로 참여한 소설가 박완서가 ‘원본 그대로 개봉 허용’을 일단 관철했으나, 이튿날 군 검열관이 따로 이 감독에게 강요해 “영자를 부를 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하는 대사의 ‘순’ 발음을 ‘응’으로 들리게 얼버무린 일화도 전해오는 명화다. 꿈을 품고 상경한, 가난하지만 순박한 시골 출신 젊은이 3명이 주인공이다. 그중에 말을 더듬는 중국음식점 배달원의 명대사엔 이런 것들이 있다. “나도 처음부터 말을 더듬었던 건 아니야. 서울 와서 할 말 못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참고 살아야 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벙어리인 척.”
그 배달원을 연기한 배우가 안성기(65)다. 1957년에 김기영 감독의 ‘황혼 열차’ 아역으로 데뷔해 활동하다가 고등학교·대학 졸업과 군 복무 등을 위해 10여 년 동안 떠나 있었던 영화계에 재데뷔한 작품이다. 장발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그가 연기해 보인, 측은하면서도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장면들은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해의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자 배우 신인상을 받은 그 영화를 그는 자신의 첫 순위 대표작으로 꼽는다. 한국영화가 3류 취급을 받던 시절에 ‘영화인이 존중받고 동경의 대상이 됐으면 좋겠다’며, 출연 영화 선택을 항상 신중히 하고, 일상의 삶 또한 다른 배우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게 반듯해야 한다고 다짐한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그 이래 걸출한 연기력으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기필코 임무를 완수한다고 해서 ‘독일 잠수함’으로도 불린 그는 단 한 차례 TV 수사극에 출연했던 일 말고는 영화 외길을 걸어왔다. 출연작 130여 편 대부분이 명화인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그중 27편을 골라 그의 데뷔 60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3일 시작한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展)’이 오는 28일 막을 내린다.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국민 배우’의 명품 연기를 앞으로도 오래,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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