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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787]英여왕과 박근혜의 65년/한기흥 논설위원/동아일보/2017.02.06.

시온백향목 2017. 2. 28. 21:25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젊은 여성이 공주로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여왕으로서 내려왔다.” 영국의 전설적 사냥꾼이자 저술가인 짐 코빗이 케냐의 한 국립공원에 있는 트리톱스 호텔의 일지에 남긴 글이다. 사파리 관광객들이 야생동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무들 위에 지은 이 숙소에 19522520대 여성이 투숙했다가 밤새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다음 날인 6일 졸지에 후계자가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조지 6(말더듬는 왕을 소재로 한 영화 킹스 스피치의 실제 주인공)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나흘 전, 한국에선 장차 공주로 세간에서 불리게 되는 아기가 태어났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61년 뒤인 2013115일 런던 버킹엄궁에서 만난다. 이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이끈, 박 대통령이 평소 롤 모델이라고 했던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로열패밀리도 오리지널은 다르다. 엘리자베스 2세는 공주 시절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친을 설득해 영국 여군부대에 자원입대했다. 보급차량 운행 임무를 맡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고, 흙바닥에서 차량을 정비하며 또래들과 함께 복무했다. 1992년 윈저 성 화재 복구에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되는 데 비판 여론이 일자 왕실의 면세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다. 즉위 60주년인 2012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영국의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꼽힌 배경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아들인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이혼 등 사적으론 힘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93세를 앞둔 나이와 상관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어쩌면 임기를 다 못 채울지도 모를 박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1세가 아니라 2세만 제대로 본받았어도 좋았을 뻔했다. 공주처럼 권좌에 오른 박 대통령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려올 것인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