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진리를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고수하며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불쑥 다가와 믿음을 고수하는 이유나 인생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세 사람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신들을 숭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단적인 것들을 소개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고발했다. 시민 배심원 500명 중 280명이 첫 번째 평결에서, 360명이 두 번째 평결에서 사형 판결을 내렸다.
예수는 공생활 3년 동안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멸시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福音)을 선포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난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복음 23장) 유대 민중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화가 난 민중은 빌라도 법정에서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다.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자신들을 비판하는 데 위협을 느껴 배심원과 군중을 회유하고 속여 사형에 처하도록 이끌었다. 소크라테스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시민 삶을 개선하겠다는 소망에서였다. 그의 죽음은 철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으로 평가된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 예수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민주(民主), 곧 민의 주인 됨이다. 복음화는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난 5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첫 변론에서 서석구 변호사가 “소크라테스도 사형 선고를 받고 예수도 십자가를 졌다. 언론은 다수결의 함정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언론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시민이자 예수를 법정에 넘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촛불 시민은 우매한 군중이다. 과연 그런가.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최고 권력자였던가. 그들이 부당하게 권력을 휘둘렀던가. 그 반대였다. 이성의 명령에만 따라야 한다고 한 소크라테스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예수를 박 대통령과 비교하는 것은 황당하다. 그만큼 논리가 궁하다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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