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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열하일기 / 연암 박지원

시온백향목 2017. 5. 28. 22:14

[서평] 열하일기 / 연암 박지원 / 북드라망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문인이다. 호는 연암(燕巖). 정조 4(1780),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게 된 종형 박명원과 동행하여 북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청인들의 실생활을 보고 돌아와 쓴 기행문이 [열하일기]이다. 홍대용·박제가 등이 소속되어 있던 북학파의 거두로서 우리나라 실학 연구에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유려한 문장과 진보적인 사상으로 한문소설인 [양반전],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 선생전], [민옹전] 등 여러 작품을 썼으며, 저서에는 [연암집],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이 있다.

 

1780, 부도 명예도 없이, 울울한 심정으로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찾아온다.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따라 나선 여정이다.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여행의 기록이다. 열하는 중국인들이 '천하의 두뇌'로 여긴 곳이다. 두뇌를 누르고 있으면 오랑캐인 몽골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셈이라고 여긴 황제가 자주 머문 '2의 황성'이다. 바로 이 여정을 통해서 연암의 작품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몽골·위구르·티베트 등 변방의 이민족들, 코끼리·낙타 등 기이한 동물, 화려한 불꽃놀이와 연회, 요술 행렬 등 이질적인 문화의 장면을 모두 섭렵하고 눈을 부릅뜨며 바라본다. 그리고 기록한다. 또 그는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한족 선비들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즐긴다. 비록 필담이지만 연암은 세상을 담은 가볍고도 무거운 이야기, 주자학과 불교 문제, 우주관 따위의 깊이있는 주제를 중국인들에게 당당하게 펼친다.

 

갑술일편(627)을 읽어보니 책문 안의 인가를 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주변의 진열 상태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대충 해놓지 않고,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것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깔끔하다. 땔감 쌓아 놓은 것이나 두엄 더미까지 그림처럼 고운 모습을 보며, 비로소 이용사상(利用思想)을 생각한다.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덕을 바로 잡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다.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경제적 여건 혹은 기본적인 품위유지가 가능한 이용사상을 피력하고 있음을 읽는다.

 

털털거리는 승용차, 버스, 스마트폰도 없이 말 고삐를 쥐고 때로는 칠흙같이 어두운 야삼경, 손에 등불 하나만을 든 채 한줄기 볓빛을 바라보며 동북부의 요새인 고북구를 통과하는 장면은 열하일기 최고 하이라이트다. 그때의 경험을 옮긴 것이 바로 오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편을 보니, 연경에서 열하로 갈 때 창평으로 길을 잡으면 서북쪽으로 해서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고, 밀운으로 길을 잡으면 동북쪽으로 해서 고북구로 나온다. 연경 북쪽 800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거용관 동쪽 200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 데, 그 호북구를 고북구라고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무령산을 따라 배를 타고 광형하를 건너 야밤에 고북구를 빠져 나온다. 때는 바야흐로 야삼경, 겹겹의 관문을 나와 장성 아래 말을 세운다. 붓과 벼루를 꺼낸 뒤 술을 부어 먹을 간다. 장성을 어루만지며 벽 한 귀퉁이에 일필휘지한다.

 

건륭 45년 경자 8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

 

당시에 이 문장을 붓으로 쓰지 않고 바위에 새겼더라면 230여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그의 문장을 생생하게 접해볼 수 있을 거라는 흥미로운 상상도 해본다.

 

당시 청나라는 세계 문명의 중심이었다. 조선은 그에 견주면 외부와 교역이 차단되어 어떤 면에서는 낙후된 상태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백성의 이용후생을 위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견주어 문화를 볼 뿐 중국의 문화를 절대적 우위에 놓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연암은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느 곳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삶의 공간을 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열려 있어서, 자유 공간을 만들어 낸 다음 그 공간을 꽉 채우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