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야 할 길은/저기 저 수직 상승/ 흐르는 시간을 가로막고 선 기암절벽/ 망각의 세월을 뚫고 솟구친 붉은 꽃이/ 주체할 수 없는 늙은이의 욕정이면 또 어떠랴/ 시간의 고삐를 놓아 버리고/ 꿈 같은 현실을 지워 버리고/ 이제 내 사랑을 만날 시간이 되었네.’ 극작가·연극연출가·시인 이윤택(64)이 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를 계간 ‘시인세계’ 2009년 가을호에 현대적으로 풀어쓴 ‘꽃을 바치는 시간’ 일부다. 이에 앞서 그는 문화일보 2007년 11월 17일 ‘살며 생각하며’난에 기고한 에세이 ‘꽃을 바치는 시간’에서 ‘헌화가’를 자신의 언어로 고쳐 쓰겠다고 예고하며 이렇게 밝혔다. ‘그냥 흘러가는 수평적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꽃을 따러 절벽을 오르는 그 수직 상승의 시간이야말로 꽃을 바치는 시간이며, 삶의 절정이다.’
‘문화 게릴라’ ‘문화 무정부주의자’ 등으로도 불리는 이윤택이 거기에서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력을 더 확장한 것이 시극(詩劇) ‘꽃을 바치는 시간’이다. 대사 대부분을 시로 구성해 함축성·상징성·음악성 등이 두드러지는 시극은 ‘문학과 연극의 공통 조상’이지만, 현대엔 거의 잊어진 양식이어서 되살려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한다. 이윤택이 “시극은 고대 그리스 ‘오디세이아’부터 한국의 ‘바리데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된 문학 양식”이라며 자신이 창립해 이끌어온 극단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한 ‘필생의 작품’으로 ‘헌화가’의 현대적 변주인 ‘꽃을 바치는 시간’을 창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시극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 ‘문학창작기금’ 지원 공모에서 심의위원들이 희곡 분야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발표에선 제외됐다. 그 여파로 지난 10일부터 오는 12월 4일까지로 예고됐던 초연 또한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이윤택이 박근혜정부에 찍혀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오래된 카페 아미고’ ‘인문주의는 철 지난 팝송처럼’ ‘노망은 늙은이의 희망, 니체는 나체로!’ ‘참을 수 없는 바람기 때문에. 시간은 인간을 어쩌지 못해’ ‘별이 된 사람’ 등 5장으로 구성된 시극 ‘꽃을 바치는 시간’이 “문화예술계는 정부 지원금이 끊긴다고 죽지 않는다”고 한 이윤택의 말대로 무대에 오르는 날도 머지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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