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달 새 쏟아진 비보(悲報)들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점을 새삼 환기해준다.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 하일성 야구 해설가, 정장식 전 포항시장 등 유명 인사의 자살이 대표적 사례다. 하기야 매일 40명이 자살하고, 800명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고민하고 있다니 툭 하면 터지는 자살 사건이 더 이상 놀랄 일은 아니다. ‘자살 방지를 위해 범국가적·범국민적 대응이 절실하다’는 ‘외침’이 유독 더 와 닿는 이유다.
그런데 요즘 보험업계에선 이런 분위기와 동떨어진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살 재해사망보험금’ 얘기다. 상법 제659조에 따르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보험사고에 대해선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자신의 선택으로 사망이라는 사고를 발생시킨 자살은 보험금의 지급 사유가 될 수 없다. 상식적으로도 자살 사고에 보험금을 준다면 이를 노린 자살 범죄를 어떻게 감당할 텐가.
자살과 무관했던 생명보험사들이 어쩌다 자살보험금 논란에 빠져들게 됐을까. 화근(禍根)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생보사가 ‘자살을 해도 재해사망금을 준다’는 어이없는 약관을 만들었고, 다른 보험사들도 이를 베껴 쓰면서부터다. 이 약관이 바로잡힌 2010년 4월 이전까지 팔린 상품만 282만 건에 달한다. 생보사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약관오류라며 자살한 가입자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금융감독원이 ‘약관을 지키라’고 압박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대법원도 ‘약관대로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려 감독 당국과 소비자 손을 들어줬다. 생짜로 내줘야 할 보험금이 2000억 원을 훌쩍 넘자 일부 생보사는 또 보험금 청구 소멸시효기간 경과 계약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번엔 대법원이 ‘시효가 지났으면 지급 의무도 없다’고 결정해 보험사 편을 들었다.
법적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보험사들 고민은 더 깊어졌다. 보험금을 안 주자니 강력 제재하려는 금감원이 두렵고, 내주자니 배임의 덫에 걸려들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여론도 “약관은 소비자와의 약속이니 보험사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쪽과“보험금 지급을 강제하는 금감원의 막무가내식 행정은 포퓰리즘”이라는 쪽 주장이 팽팽하다. 정작 중요한 ‘자살 예방’ 목소리는 쏙 빠져 있으니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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