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속의 허공 ―채필녀(1958∼ )
공이 대문 한쪽에 놓여 있다
저 공, 운동장 한구석에서 주워왔다
그 한구석도 어딘가에서 굴러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무심하게 놓여진 공은 또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은 한 번도 스스로 굴러본 적이 없다
우주가 돌아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엄마의 큰 보폭에 아이가 종종종 발짝을 맞추듯
커다란 톱니에 작은 톱니가 맞물리듯이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구와 공이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
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공은 새처럼 나무처럼 살고 싶어
빈 가죽부대로 버려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의 상처를 본다
제 몸을 터질 듯 솟구쳐 승리에 도취하기도 했던,
함정에 빠져 패배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공의 내면이 궁금하다
공기가, 공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을까
공의 몸이 허공으로 풀어지고 있다
공의 중심이 허공의 중심을 채우고 있다
붉은 살이 서쪽 능선을 넘고 있다
공이 제 몸인 허공을 보고 있다
허공은 언젠가 공의 몸이 되어
굴러가고 또 굴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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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간의 낡은 공이 ‘지구와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한, 그러나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인간 존재까지 튀어 오르고 굴러간다. 직관과 성찰, 그리고 그를 시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빼어나게 보여주는 시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나는 다른 종(種)을 잉태했다’는 혈기 방장한 처자 시인의 시골생활이 발랄한 해학과 감성으로 그려져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 가령 ‘우리 집은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첫 번째 집도 아니고 수령 이백 년 된 은행나무집도 아니고 마을회관 옆이나 뒤도 아닌 평범한 나무대문집이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야 커다란 사철나무가 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 가지가 넘는 붓꽃이 자라고 있지만 자장면 배달은 대문 밖의 일이다 이름이나 번지수가 아닌 표시를 대라고 성화다, 아직 신이 오르지 않아 깃발도 꽂지 못하고 아들이 없어 농구대도 세우지 못한 나는, 우리 집 지도를 그릴 길이 막막하다 길이 없다//비 오는 날, 대문 밖에 나가 무슨 깃발처럼 두 팔을 흔들어 배달된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으며 내가 누구에게든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시 ‘자장면 배달은 상징 찾기이다’)에서 읽히는,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소외감을 대범한 편임에도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 보석 같은 재능이라도 주목 받지 못하면 도태된다지. 흙 속에 묻힌 보석 같은 시인이 얼마나 많을까….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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