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 음악계에 데뷔하여
거의 반세기 가까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그녀는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꼽히는 아티스트로 그 어느 여가수보다도 많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큼지막한 뿔테 안경과 긴 생머리, 자신의 최초 히트곡이자
별명이기도 한 ‘아테네의 흰 장미’를 연상시키는 흰 옷과
지적이고 수수한 이미지의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맑고 고운 음색을 앞세워 화려함으로 장식된 대중음악계에서 변함없는 팬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녀가 전세계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보여준 다양한 음악 스타일 덕이다.
모국인 그리스어는 물론 무려 7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재즈와 팝, 록, 샹송, 그리스 전통음악, 오페라 아리아, 종교음악, 포크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유럽은 물론 미 대륙과 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팬들을 확보해나갔다.
그녀의 주무기는 바로 익히 알려진 각국 음악을 리메이크하거나
다른 언어로 ‘번안’해 부르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오리지널 히트곡도 많지만 팝과 전통 민요, 포크,
심지어는 클래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그녀의 입을 빌어 새롭게 태어났다.
나나 무스쿠리는 1934년 10월 13일 그리스의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테네로 옮겨간 그녀는 12세 때부터 보컬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프랭크 시내트라나 엘라 핏제럴드, 빌리 홀리데이 등의 재즈 보컬리스트,
그리고 에디트 피아프 등 샹송 가수들에게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16세 때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했지만 결국 재즈에 빠져들어
재즈 밴드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결국 성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그 무렵, 아그네스 발차, 조르주 무스타키 등의 히트곡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거물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와 만나게 되면서
대중음악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1958년 하지다키스의 노래를 담은 음반을 발표했고 이듬해 <그리스 음악제>
에서 하지다키스의 노래를 불러 대상을 수상한 그녀는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거머쥐며 확실히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해외로 진출한 그녀는 하지다키스의 노래에 독일어 가사를 붙혀불러 독일에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트윈폴리오가 번안해 부른 ‘하얀 손수건’으로
히트시켰고, 마노스 하지다키스가 만든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주제곡 역시 그녀의 몫이었다.
1962년 거장 퀸시 존스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The Girl From Greek Sings]를 발표했고, 영국에서도 스탠더드 곡을 부른
[My Colouring Book]을 냈다. 파리에 정착한 뒤
미셸 르그랑의 곡을 받아 음반을 냈고, 미국에 건너가 영어 앨범 [Nana Sings], 해리 벨
라폰테와의 라이브 듀엣 앨범 [An Evening With Belafonte/Mouskouri]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69년엔 영국에서의 첫 정규 음반 [Over And Over]를 내놓아
차트에 2년여 동안 머무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커다란 인기를 모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84년엔 20여년만에 고국인 그리스에서 공연을 가진데
이어 그리스어 앨범을 발표했고, 이 무렵 또 다른 히트곡 ‘Only Love’를 터뜨려
건재를 과시한다.
스페인어 싱글 ‘Con Todo el Alma’를 통해 스페인어권 팬들에게도 다가선 그녀는
오페라 아리아 등 클래식 작품을 다룬 [The Classical Nana]를 내놓으며 장르와 언어를
넘나드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도 쉼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활동 영역은 음악에만 머문 것이 아니어서 1993년엔 유니세프 인권대사로
임명이 되었고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 연합 의회에서
그리스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Nana Mouskouri - Plaisir D'Amour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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