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쁨 (Plasir d'amour)",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수많은 히트곡으로 세계 곳곳에 있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음악의 감동을 선사했던 가수. UN 친선 대사를 비롯한 사회사업활동과 인권 운동, 그리고 가수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던 대가수가 바로 나나 무스꾸리이다. 나나 무스꾸리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청순해서 세속과는 저멀리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 무스꾸리와 같은 가수는 목소리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뿐, 환갑이 넘은 세월의 흔적이나 얼굴에 아로새긴 현실의 모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금세기 최고의 가수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대중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음반들을 발표하면서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그리스 음악을 가장 잘 부르는 그리스 가수'로 세계에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나 무스꾸리는 1934년 10월 13일 그리스 크레타섬(지중해동부섬)의 찬니아에서, 아테네의 어느 작은 영화관에 근무하던 영사기사의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조촐하고 평화로운 살림이었고 의좋은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악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영사기사였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 뒤에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인생은 나의 꿈이었다. 특히 뮤지컬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집으로 들아와 내가 본 영화의 주인공을 흥내내면서 마음껏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부르고 가사를 외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는 기어이 노래로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를 품었었던 것 같다. 나나 무스꾸리는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여 성악도로서의 재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눈앞에 둔 어느날,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음악에 넋을 잃고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세계가 열렸다고나 할까. 후일 나나 무스꾸리의 술회를 보면 '갑자기 밝은 햇빛이 비친 듯 나의 음악 세계가 눈부시게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녀가 하이틴시절에 강렬하게 이끌린 것은 오페라의 세계가 아니라 재즈 음악이었다. "15세 되던 해,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라디오로 아테네 방송의 재즈 프로를 듣는 것이 나의 첫 일과였다. 때문에 음악원의 공부시간에는 몰려드는 잠을 쫓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노트에 채보하면서 노래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정말 학교 공부는 젖혀놓고 재즈에 미쳐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의 재즈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 조니 미첼, 존 바에즈의 포크송도 무척 즐겼고, 자크 브렐이나 조르지 브라상, 레오 페레 같은 샹송 가수들은 나의 우상이기도 했다. 나에게 이 기념할 만한 라디오는 지금도 어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결국 나나 무스꾸리의 남달리 적극적이고 민감한 예술적 감각은 그녀를 아테네 음악원의 이단아로 만들었고,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상황을 낳게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대중가수에 뜻을 두고, 아테네 라디오방송국에서 소편성의 밴드가 반주하는 유행가를 노래한 사실이 물의를 일으켜 규율이 엄격한 음악원측에서는 그녀의 졸업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흔히 '오페라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도 아테네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명가수 히달고에게 사사한 경력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나 무스쿠리의 퇴학은 어쩌면 마리아 칼라스를 이을 인재를 잃은 반면, 유로 팝스의 역사상 불후의 위대한 스타를 탄생시킨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수년간 나나 무스꾸리에겐 기약없는 무명의 나이트 클럽 가수 시대가 계속된다. 이 고달프고 기나긴 슬럼프에서 그녀를 구해낸 사람이, 그녀의 평생의 은인이며 친구가 된 위대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였다.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영화 '페드라', '희랍인 조르바'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더불어 현대 그리스 음악계의 최대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작곡가로, 1960년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아테네의 한 작은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이 가냘픈 몸매의 무명가수 나나 무스꾸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대성할 자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마노스 하지다키스 같은 대작곡가의 작품으로 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나 무스꾸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수였다. 그녀는 1960년 9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지중해 가요제'에 그리스 대표로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의 그랑프리를 획득한 그녀는 새로운 스타로 탄생하여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부른 곡이 마노스 하지다키스 작곡의 "아테네의 흰 장미"였다. 그녀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다. 나나 무스꾸리를 놓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있다. 프랑스 '필립스 레코드'의 디렉터 루이 아장이다. 그는 나나 무스꾸리의 매력을 발굴하여 대스타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를 루이 아장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공개 이후, 영화에서 부듯가 창부 역의 멜리나 메르쿠리가 흥얼거린 주제가의 인기는 파리를 뒤흔들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곡을 따라 불렀고, 독특한 울림을 전해 주는 그리스의 민속악기 부주키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에서 전해 오는 음악 중에는 보다 색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의 레코드사에 연락해서 그 곳 가수들의 샘플 레코드를 부탁해 직접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며칠 뒤 산더미 같은 레코드가 그리스에서 도착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듣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멜로디가 꽤 아름다운 곡이 몇 곡인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조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릅고 신선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어느새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도취되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한 목소리인가! 누구의 노래일까? 그리스어를 약간 아는 내 처 오딜이 레코드를 듣고 가수의 이름을 읽었다. 나나 무스꾸리.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에게 전혀 미지의 인물이었다. 우리는 곧 바캉스를 취소하고 때마침 열리고 있는 에레니크 가요제에 참석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대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지금도 나는 그 때 일을 잊지 못한다. 아름답고 자신에 찬 미녀가수들이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나나 무스꾸리가 아닌가 하며 가슴을 두근거렸으나, 번번이 나의 기대는 어긋났고 그럴수록 초조감은 더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한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코 위에는 안경을 걸친 그녀는 겨우 40킬로그램을 넘을 듯한 가냘픈 몸매를 한 볼품없는 여성이었다. 설마 저 촌스런 아가씨가 나나 무스꾸리는 아닐 테지. 그러나 그녀가 수줍은 듯한 몸가짐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만났던 것이다. 나나 무스꾸리 를!!" 나나 무스꾸리는 이때부터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 연주여행을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그녀는 게오져(George)(아테네 그룹 멤버)와 결혼했고, 여전히 그리스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곧 유럽(첫 번째는 독일 그리고 프랑스 영국에서 유명해짐)과 미국의 대스타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와 쿠닌시 잔스(Quincy Jones) 같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지 했다. 196l년 아테네에서 나나 무스꾸리를 만난 해리 벨라폰테는 3년 후인 1964년 그녀를 미국에 초청하였다. 넓은 미국 무대에의 데뷔는 나나 무스꾸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이었지만, 인종분규가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흑인 가수와 함께 무대에 서는 백인 여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들의 숱한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공연한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 카네기 홀을 비릇한 미국 각지의 대학 캠퍼스와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져 대단한 환영과 절찬을 받았다. 그녀는 미국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나 무스꾸리가 프로 가수로서 미 대륙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스탠더드 넘버들을 주로 부르는 그리스 출신 여성 재즈 가수(!)'로서라고 한다. 1962년 당시 미국에서 발표되었던 음반은 [그리스 처녀 노래하다 (The Girl from Greece Sings)]였고, 이 음반은 이후 [뉴욕의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in New York)]이라는 제목으로 CD화되었는데, 수많은 클래식과 대중 음악, 그리고 그리스 전통 대중 음악을 세계에 알렸던 그녀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의외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자신은 재즈로 음악을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엘비스, 프랭크 시나트라, 마할리아 잭슨,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당시 나나 무스꾸리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역시 청순한 그리스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데뷔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이 당시 촉망받는 신인 가수, 작곡가 겸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Quincy Jones)였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의 '차세대 재즈 거물'과 그리스의 '원조 수퍼스타'가 만나 [The Girl from Greece Sings]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 음반의 커다란 성공에 힘입은 나나 무스꾸리는 이후 최정상의 인기를 달리면서 발표하는 음반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조국 그리스의 음악만으로 구성된 음반을 기획한다.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서를 세계에 소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했는데, 결국 이 기획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함께 그리스 국민 작곡가로 추앙받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1967년, [내 조국의 노래 (Chant du mon pay)]라는 제목으로 정식 공개된다. 여기에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작품 "Manoula Mou (마눌라 무; 나의 어머니)"와 함께, "하얀 손수건"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Me T'aspro Mou Mantili (메 따스프로 무 만띨리)"를 만날 수 있다. 이후 그리스의 전통 음악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민요와 히트곡, 클래식을 보다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앞장섰던 나나 무스꾸리. 그녀는 50년 가까이 쉬지않고 노래와 음악을 했으며, 1000곡이 넘는 음악과 수백장의 플래티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것은 유일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나나 무스꾸리는 프랑스의 텔레트론(Telethon)에서 첫 번째 대모가 되기도 했고, 유니세프 대사와 유럽 국회위원으로 활동(1994~1999)을 하기도 했다. 2001년 앨범인 [Classic] 발매기념으로 그녀는 오스트렐리아, 아메리카, 유럽의 무대를 가지기도 했다. 그녀는 계속 음악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성공했지만 겸손하고 신중함은 많은 팬들의 가슴에 물결치고 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녀의 모습은 단지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로서가 아니라 사회 사업과 자선 사업에 앞장서는 훈훈한 인간애를 지닌 따스한 사람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