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대중 前대통령 國葬 영결식
故 김대중 前 대통령 국장 영결식 식순
구 분 |
세 부 내 용 |
비 고 |
영구차 입장 |
|
|
개 식(14:00) |
개 식 선 언 |
사 회 자 (조순용․ 손숙) |
국기에대한 경례 |
애국가 연주(조악대) |
|
고인에 대한 묵념 |
묵념곡 연주(조악대) |
|
약 력 보 고 |
약 력 보 고 (집행위원장 : 이달곤 장관) |
|
조 사 |
조 사 (장의위원장 : 한승수 총리) |
|
추 도 사 |
추 도 사 (박영숙 : 미래포럼이사장) |
|
종 교 의 식 |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
|
생전영상 상영 |
영 상 자 료 |
|
헌 화 ․ 분향 |
상주 및 직계유족, 3부요인, 외교사절, 각계대표 등 |
조악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추 모 공 연 |
추 모 노 래 (성악가 김영미, 평화방송 소년소녀합창단) - 그대 있음에 / 우리의 소원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조 총 발 사 |
3軍 조총대 발사 |
|
폐식(15:00경) |
폐식선언 및 퇴장 |
|
故 김대중 前대통령 영결식 약력보고
故 김대중 前대통령님의 약력을 보고드리겠습니다.
故 김대중 前대통령님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인께서는 하의공립보통학교,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에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1945년 차용애 여사와 결혼하셨고, 사별하신 후, 1962년 당시 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던 이희호 여사를 만나 평생 반려자이자 정치동지로 연을 맺으셨습니다.
1961년 치러진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신 후,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셨으며 이후, 제7대, 8대, 13대, 14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치셨습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되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셨습니다.
그후,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시며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73년 8월에는 일본에서 납치당하여 수장의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으며, 1980년에는 내란음모사건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세계 각국에서 구명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82년 미국 망명 후, 1985년 귀국하셨지만, 가택연금이 반복되었고 1987년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시고,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신바 있습니다.
1992년에는 민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1993년 7월 영국에서 귀국하여,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셨습니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후,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셨습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고인께서는,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0년 6월에는,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15공동선언’을 발표하셨으며, 대북포용을 핵심으로 하는 ‘햇볕정책’을 펼쳐 남북관계의 진전에도 큰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2000년에는 남북관계 진전 및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헌신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하셨습니다.
고인께서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무궁화 대훈장을 받으셨으며, 모스크바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등 국내외 20여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저서로는 ‘김대중 옥중서신’, ‘대중경제론’, ‘3단계 통일론’ 등 20여권이 있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씨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약력보고를 마치겠습니다.
2009年 8月 23日
故 金大中 前 大統領 國葬 葬儀委員會 執行委員長
행정안전부 장관 이달곤
故 김대중 前대통령 영결식 조사 전문
우리는 오늘 나라의 큰 정치지도자이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영원히 이별하는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쾌차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우리들은 참으로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온 국민이 큰 슬픔 속에 대통령님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도 높이 평가하는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지금 세계 각국이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우리 국민과 슬픔을 함께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평생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대통령님의 이러한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정치발전의 확고한 기틀을 닦으셨습니다.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의 큰 길을 열고,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일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의 높은 위업을 어찌 이런 몇 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고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생전에 당신 스스로를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에 비유했던 것처럼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와 망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험난했던 삶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도 감내하기 어려웠을 수많은 시련을 대통령께서는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그 사이 우리나라도 숱한 어려움을 딛고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기적의 역사, 발전의 역사, 성공의 역사를 일구어낸 것입니다.
특히 민주화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님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강인한 신념과 불굴의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할 수 있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
대통령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그리고 국민 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IMF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아 과감한 개혁으로 우리 경제를 탈바꿈시키면서도 사회안전망 구축에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IT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고인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대통령님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도 오늘의 우리들이 한층 더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크나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대통령님은 생전에도 늘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간에 대립하고, 세대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반목해온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참 뜻일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탕위에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크게 도약하는 성공의 역사를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
이제 대통령님은 생전의 그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히 영면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 겨레의 앞길을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대통령님을 보내시는 이희호 여사님과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조의를 표해주신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외교사절 여러분께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온 국민과 더불어 삼가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年 8月 23日
故 金大中 前 大統領 國葬 葬儀委員會 委員長
國 務 總 理 韓 昇 洙
故 김대중 前대통령 영결식 추도사 전문
김대중 대통령님, 우리의 선생님! 이제는 더 이상 얼굴을 뵈올 수 없고, 말씀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우리와 정말 영영 이별하시는 것인가요? 대통령이 계셔서 든든했는데, 선생님이 계셔서 희망을 놓지 않았는데 우리 곁을 떠나신다니 승복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한두 번이 아닌 죽음의 고비를 기적적으로 극복해 내신 대통령님이시기에 병세에 대한 보도와는 상관없이 ‘대통령님을 한번만 더 돌려주시라는’ 이희호 여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줄을 의심치 않고 있던 우리에게 서거의 비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나요? 아니면 하늘의 뜻이 있어서인가요.
대통령님의 서거는 우리에게 이별의 슬픔만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숙원과 사회의 고질적인 갈등을 풀어내는 화해와 통합의 바람이 지금 둘불처럼 번지게 하고 있는 것은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이 있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둘이 종일 같이 있는 기쁨도 잠시,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 없이는 살기 힘들다고 하신 대통령님께서 어떻게 여사님을 혼자 두고 떠나실 수가 있습니까?
지금 지구촌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세계인이 대통령님 영전에 꽃을 바치고 있습니다.
갈라진 남과 북의 산하가 흐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꿈을 키웠던 저 남쪽 바다가 울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독재정권 아래에서 숨쉬기조차 힘들 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희망이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총과 칼이 가슴을 겨누어도 님께서는 의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하시고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셨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역사와 국민을 믿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대통령님을 인동초라 불렀습니다.
가을에 익은 열매가 겨울 눈 속에서 더욱 붉었으니, 인동초는 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험한 곳에 계셨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은 강철 같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님의 믿음대로, 예언대로 이 땅에 민주주의가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 우리는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고마운 줄 몰랐습니다.
이제 살펴보니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과연 누가 산보다 우람한 거목이 떠나간 자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 대원로를 잃은 우리는 이제 나라의 큰 일이 나면 어디로 달려가야 합니까.
국민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입니까.
당신께서 떠나니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당신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번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던 진정한 민주투사였습니다.
온갖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불굴의 정치인이었습니다.
사상 초유의 외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의 미움을 녹여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들을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용서와 화해’라는 귀한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은 버마, 동티모르 등 세계의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과 북의 화해를 이뤄내 노벨 평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용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지구촌의 평화를 지키셨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당신의 피와 눈물 속에 피어났습니다.
당신께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신이 일구어낸 민주 사회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진정 국민이 주인인 세상을 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여성부를 신설하고, 정보고속도로를 완성하여 정보기술(IT)강국을 만들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주변을 맴돌던 한국 외교를 국제무대 한 가운데로 끌고 나가 나라의 격을 높이셨습니다.
국민의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하여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재임 시절에 한류가 지구촌 구석구석에 흘렀고, 월드컵 4강의 함성에 세계인이 놀라고, 문화를 개방하여 국민의 자긍심을 높인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님의 우리 문화에 대한 혜안과 인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던 식견을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대통령님께서는 저 격동의 세월을 실로 쉬지 않고 달려오셨습니다.
퇴임 후에도 민족의 내일과 전 지구적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와 세태를 꾸짖고 곳곳에 평화를 심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모여 대통령님의 업적을 헤아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많은 것들을 이루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선생님.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마지막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말씀대로 깨어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깨어 있으면 당신이 곁에 계실 것을 믿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은 진정 위대하고 평화로웠습니다.
김대중이란 이름은 불멸할 것이니 이제 역사 속에서 쉬십시오.
대통령님, 당신의 국민들이 울고 있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저희를 인도해 주십시오.
김대중이 없는 시대가 실로 두렵지만 이제 놓아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25일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매일 밤 이희호 여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시면서 목이 메어 말씀을 한참 잇지 못했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님, 벌써 그립습니다.
늘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님, 이제 그 존경과 사랑을 당신께 드립니다.
지난날은 진정 고단했으니, 부디 편히 쉬십시오.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
故 김대중 前 대통령 추모문화제
이희호 여사 인사말 -23일 오후 운구행렬중 서울광장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와 국장 기간에 여러분이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권력의 회유와 압력도 있었으나 한번도 굴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가 바라옵기는 남편이 평생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평화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대중 前대통령님 지석(誌石) 문안 . |
公의 성은 金氏, 본관은 金海, 휘는 大中, 호는 後廣이다.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어머니 장수금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암서당과 하의도 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대중의 영특함을 살리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고, 대중은 전학 간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9년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유망한 청년실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50년 9월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들의 무차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탈출,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산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장면박사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선거에서 거푸 낙선을 하다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의 꿈이 무산되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인 이희호와 결혼했다. 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요한 낙선 공작에도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후보로 뽑혔으나 이듬 해 치른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 중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나 망명길에 올랐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국에 끌려와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잡혀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되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85년 망명 생활 2년 만에 귀국을 강행,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야당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그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처음 국장으로 모셔졌고,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히셨다. 자손으로는 아들 홍일, 홍업, 홍걸이 있고, 손자와 손녀는 지영, 정화, 화영, 종대, 종민, 종화, 종석이 있다. 수많은 학위를 받았고, <옥중 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골은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삶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별장 (0) | 2018.08.09 |
---|---|
[스크랩] "외국어 몰라도 겁 안나요"..AI 번역 서비스·기기 봇물 (0) | 2018.03.06 |
[스크랩] ** 몸이 음식 거부해 45년간 물만 먹고사는 양애란씨 ** (0) | 2016.12.28 |
[스크랩]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 (0) | 2016.10.19 |
사람을 발전시키는 33가지 (0) | 2016.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