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8> 얼어붙은 발 / 문정희

시온백향목 2017. 5. 31. 23:17

얼어붙은 발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문정희(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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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가장 정성껏 아름답게 꾸민 신부가 예식을 앞두고 대기실에 앉아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 고독을 보여주는 시다.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는 결혼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할 수 없는, 여태와는 멀고 다른 삶으로의 이민을 눈앞에 둔 소스라침이다.

 

많은 기혼여성이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날로 자기 결혼식 날을 꼽는다. 모든 신부에게 이날이 행복한 첫날이기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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