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통영 예술 기행

시온백향목 2017. 5. 31. 22:37

통영 예술 기행 일정  / HK여행작가

2017년 <3월 11일(토)>

07:00 서울 출발 : 을지로입구 한국관광공사 정문
10:30 산청 도착
10:30-12:00 남사마을 탐방
13:00-14:00 점심(삼천포 한정식)
14:30-15:30 상족암 탐방
16:30-17:30 세병관 답사
17:30-18:30 동피랑 마을 탐방
18:40 숙소 도착
19:00-21:00 저녁식사및 뒷풀이(대추나무다찌)
21:00 자유시간 및 취침 

<3월 12일(일)>

06:30 기상
07:30-08:30 아침식사(도다리 쑥국-송학횟집)
09:30 달아항 출항
09:45 연대도 도착
09:50-12:00 연대도 만지도 답사
12:00연대도 출항
13:00-14:00 점심식사(이중섭식당 갈치조림)
14:00-15:00중앙시장 장보기 및 자유시간
15:00 서울향발

깊은 멋과 맛의 본향(本鄕) 통영(統營)


통영은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전혁림 선생 등 예술계의 거목들이 나고 자란 땅이다. 가히 ‘예향’ 이를 만하다. 게다가 통영은 맛있기까지 하다. 맛에 관한 한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다. ‘경상도의 전주’다. 자다가도 일어나 떠나고 싶은, 여행자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도시 통영으로 갑니다. 통영에서는 또 화석에너지가 아니라 재생가능에너지로 에너지 자립을 이룬 한국 최초의 에너지 자립섬 에코 아일랜드 연대도에도 갑니다. 연대와 바로 옆 섬 만지도 사이에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풍경 또한 장관입니다. 통영으로 가는 길목에는 고매와 돌담, 한옥이 아름다운 산청 남사 마을과 세계 3대 공룡 유적지이자 선녀들이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천하비경 상족암에도 들릅니다. 짧지만 참으로 풍성한 출사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통영 예술기행 답사 강연> 강제윤 소장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 사단법인섬연구소 소장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이기도 하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등단했으며, 문화일보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된바 있다.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500여개)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400여 개의 섬을 걸었다.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 <당신에게 섬><섬택리지>(문광부우수문학도서) <통영은 맛있다>(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섬을 걷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 우수문학도서) 등 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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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통영>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과거 통영은 500여 척의 전함과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다. 사람들은 통영이 본래부터 경상도인 줄 알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1603년,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한미(寒微)한 포구였던 경상도 고성현 두룡포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 곧 통영이다. 경상도 땅에 건설됐지만 통영의 수령인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이었고,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독자적으로 통영과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수군 주둔지들을 다스렸다. 통영은 3도에서 온 군사들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모여 이룬 융합도시였다. 이들이 경상도와는 별도로 3백여 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었다.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다.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이다.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는 경상도에서 통영만 유독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통영이 경상도가 아닌 ‘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던 데서 유래한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곳이라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풍요로워야 맛이 개선될 여지가 생기는 법이다. 과거 통영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었다. 정조 때는 통영에 주전소까지 있을 정도였다. 통영에 엄청난 부가 집중됐었다는 뜻이다.  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은 인근에 김제만경 평야라는 큰 들녘과 풍요로운 갯벌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다.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선경을 방불케 하는 미륵산 정상 풍경 Ⓒ이상희


▲미륵산에서 바라보는 한산도 등 통영 섬들과 거제도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묵화 다. Ⓒ이상희


▲통영의 상징이자 평화의 염원이 깃든 세병관 Ⓒ이상희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이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다..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이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이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다.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에서 통영의 랜드마크가 된 동피랑마을 Ⓒ이상희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동피랑이 지금은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동피랑은 오랫동안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통영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다.

오래 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린 것이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다.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한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이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이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이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이다. 

▲연대도 가는 뱃길Ⓒ강제윤

<연대도,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의 섬>


 ‘윷놀이 최고의 고수 서재목, 손재희의 집’  


‘목소리 크고 음식솜씨 좋은 아내 손재희. 연대도 개그맨 서재목씨가 달리기를 잘 하는 김동희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 ‘전통 어가를 그대로 간직한 백옥수 할머니 집. 영화 <백프로>에 나온 집입니다’

연대도의 집 담벼락에는 아주 특별한 문패가 하나씩 걸려 있다. 집에 사는 주인의 내력이 적힌 나무판자. 모르고 지나가면 그저 그 집이 그 집일 뿐인 섬 집들. 담벼락에 적힌 설명으로 인해 그 집들이 살아났다. 어느 한 집 예사로운 집이 없다.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 화초를 좋아해서 목부작을 잘 만드는 이상동 어촌계장의 집입니다. 말이 없어서 답답할 정도지만 사람 좋은 집’ ‘산양 읍내에서 가장 낚시를 잘 하는 어부네 집. 음식솜씨 좋고 동작이 빠른 아내 김혜원과 임중호가 금슬 좋게 사는 집’ ‘허우두리 할머니댁. 연대도에서 태어나 연대도로 시집 오셨습니다. 시금치, 마늘, 밭농사를 지으십니다. 젊었을 때 한 미모 하셨답니다’ ‘꽃이 있는 풍경, 허정자 할머니. 작은 집 안팎에도 담장과 골목길에도 사시사철 꽃을 키우는 마음 착한 할머니댁’ ‘연대도 유일한 담배집, 가장 오래된 밀감나무와 시원한 우물이 있습니다. 백또성아 할머니댁’

경남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 연대도. 통영시는 2009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대도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연대도를 생태섬, 무공해섬, 화석에너지와 쓰레기 제로의 섬, 에코아일랜드로 만드는 사업을 진행해 2013년 5월 18일 준공식을 가졌다. 외부 자본을 배제하고 섬 개발의 이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을 이루었다. 1단계로 연대도 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둔 33층의 다랭이밭을 야생화밭으로 조성하고 폐교를 리모델링해 숙박을 겸한 에코체험센터를 가동 중이다. 이들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가 도입되었고 생태탐방로도 조성되었다. 2011년 완공된 150k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기를 사용한다. 가구당 1천원 남짓으로 전기세가 낮아졌다. 

오래된 마을회관 건물을 헐고 마을회관과 경로당, 비지터센터를 지었다. 외부 화석에너지를 사용치 않고 자연에너지(지열, 태양광 등)를 이용해 냉난방을 하는 공공건물 최초의 페시브하우스(Passive house)다. 화석에너지 제로의 섬, 이제 연대도는 외부 전력 공급 없이 태양광, 지열 등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온 섬의 전력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대안에너지 체험교육의 메카로 부상했다. 2011년 여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100여명이 참가한 지역에너지학교도 열렸다.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사례다. 향후 대안에너지 체험시설, 전통어가 복원, 연대도 폐총 복원, 허브단지 조성, 대표브랜드 농수산물 개발 등 다양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들 모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사업들이다.


▲통영도 섬왕국이다, 만지도 앞의 무인도 풍경이 한폭의 그림 같다.Ⓒ강제윤

1980년대까지도 충렬사 소작인으로 살았던 섬사람들


과거 연대도 바다에는 전복, 소라, 해삼 등이 지천으로 깔렸었다. 해마다 30명이 넘는 제주도 해녀들이 들어와 물질을 하고 갔다. 그래서 한 때는 돈이 넘친다 해서 '돈섬'으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해산물들은 종적을 감추고 섬은 노인들만 남아 늙어가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섬, 그 덕분에 섬은 개발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 섬은 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사업이 진행되면서 섬은 다시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48세대 82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32세대 59명(2009년)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석기시대 조개무더기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의 뼈가 출토된 유서깊은 섬이기도 하다. 숙종 44년(1718년) 군창(軍倉)에 속해 있던 연대도의 둔전 30여 마지기 땅이 충무공 사당인 충렬사의 사패지(賜牌地)로 지정되었다. 사패지란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 등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공신전 등을 내리고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문서로 보증해준 땅이다. 사패지인 연대도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게 했으니 주민들은 모두가 충렬사의 소작인이었다. 300석 보리농사를 지으면 150석을 공출해 갔다. 무려 5할의 소작료였다. 조선왕조시대에 국왕에 의해 하사된 땅의 지배권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와서도 이어졌다.

1970년대 초 마을에서 돈 20만원을 모아 충렬사에 주고 소작을 영구히 면제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 20만원이면 충렬사 부근 통영시내 토지 1천 평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89년에 와서야 주민들은 공지시가대로 땅값을 물고 제 땅을 만들 수 있었다. 자기 땅에 살면서 식민지를 살았던 서러운 삶이 비로소 청산된 것이다.

연대도 주민들은 어류양식과 낚시어업을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한다. 옛날에는 쌀, 보리, 고구마,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현재는 논농사는 짓지 않고 밭에 마늘, 시금치, 쪽파, 취나물, 방풍나물, 두릅 등을 재배한다. 방풍과 두릅이 많이 난다.

옛날에는 연대도에 주조장도 있었다. 일제 때 사라라는 일본 사람이 연대도에서 오오시키(정치망)어업을 했고 연대도 사람들은 일본으로 가서 머구리(잠수) 배를 많이들 탔다. 시모노세키로 굴을 까는 품팔이를 다니기도 했다. 근래까지도 다니러 가곤 했다. 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10여 년 전에도 노인회장의 인솔을 받아 시모노세키로 1주일 동안 굴을 까러 다녀왔다. 아들에게는 여행을 다니러 간다고 거짓으로 일러두고 굴을 까러 갔었다.

해방 후에는 주민들이 일본인들의 머구리배를 구입해서 조업했다. 머구리배가 23척이나 있었고 술집도 7곳이나 됐다. 갈치가 많이 잡히는 갈치어장이었고 바다 속에는 전복, 해삼 등이 지천이었다. 그래서 연대도를 ‘돈섬’이라 했다. 일본말로 ‘카네시마’다.

불교의 다비식을 제외하면 이 땅에의 장례풍습에서 화장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연대도에는 화장의 풍습도 있었다. 섬에는 두 개의 화장터가 있었다. 날이 좋을 때는 어둠골에서 화장을 하고 날씨가 궂을 때는 꼬리섬에서 화장을 했다. 화장터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화장의 풍습이 생긴 것은 농토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상동 어촌계장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을 뒤편 어둠골로 가서 직접 화장을 했다 한다.

연대봉 주위를 따라 섬길이 나 있다. 옛날 나무하러 지게지고 다니던 길이라 해서 ‘지겟길’이라 이름 했다. 지겟길을 따라 걷다 섬의 뒤 안에서 나그네는 연대봉 산길을 오른다. 그냥 걷기도 쉽지 않은 이런 험한 산길을 예전에는 다들 한 짐 가득 나무를 지고 다녔다. 여자들도 땔나무 한 단씩 머리에 이고 다녔던 고생길. 지금 이 길은 그저 산책길이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생존의 길이었다. 고개 넘어 물 길러 가지 않고 높고 깊은 산까지 나무하러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인들은 세상이 천국이 됐다고 말씀하신다. 그 뜻이 어찌 이해되지 않으랴.


▲연대도 몽돌 해변의 일몰Ⓒ섬학교


봉화불을 올리던 섬


연대도란 이름은 조선시대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왜적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연대봉 220m)에 봉수대를 설치한 데서 비롯됐다. 연대봉의 봉수대는 허물어져 돌들은 뒹굴고 숲은 우거져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다. 봉수대(烽燧臺)는 봉화불만을 피워 올리는 곳이 아니다. ‘봉’은 밤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이고 ‘수’는 낮에 연기를 피우는 것을 말한다. 봉화불은 장작이나 화약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용한 재료는 따로 있다. 승냥이 똥이다. 짐승의 똥이 군수품이었던 셈이다. 승냥이 똥에는 인이 섞여있어 그 불빛이 푸르고 멀리까지 보이기 때문에 봉화불의 재료로 사용됐다. 

봉수대 옆에는 섬의 당이 있고 당나무가 있다. 연대도의 신전이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단수는 희귀하게도 물푸레나무다. 신전은 건물이 없고 돌담을 둘렀다. 신전 입구는 새끼줄로 금줄을 처서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금줄에는 솔가지가 꽂아져 있다.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당산나무인 물푸레나무와 제단 돌에는 콩짜개 덩굴이 뒤덮여 신령한 푸른빛을 더한다.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직접 솥을 가지고 와서 밥을 지어 올리며 제를 지냈었다. 당제는 정월 초하루에서 5일 사이, 길일을 택해 지냈다.

물을 푸르게 한다 해서 물푸레나무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 물푸레나무는 질기고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겨울 물푸레나무는 못도 안 들어간다 할 정도로 단단하다. 그래서 도끼나 망치, 호미, 낮, 괭이 등의 자루로는 최고다. 형벌을 내리던 곤장이나 감옥의 창살로도 이용됐던 나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한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연대도의 당은 두 곳이다. 연대봉의 당은 윗당, 마을 뒤편에도 당이 있으니 아랫당, 혹은 중당이라 한다. 당제를 지낼 때면 윗당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혼을 달래는 산제를 모시고 아랫당산에서는 장군 휘하의 장졸들의 원혼을 달래는 당제를 모신다. 마지막으로는 마을 한가운데 별신굿 터에서 별신장군제를 지낸다. 옛날에는 무당 불러와 3일간 별신굿을 했지만 지금은 초청해 모셔온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제를 모신다. 우리 섬들을 지켜온 우리 토착신들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연대도는 참으로 소중한 섬이다.




▲남사마을의 돌담 양식은 신분의 표식이기도 하다. 양반집은 토담인 반면 서민들 집은 돌만으로 쌓은 강담이다 Ⓒ강제윤

<산청 남사마을>


초봄 매화꽃이 화려한 곳은 광양 매화 농원들이 손꼽히지만 고졸한 멋의 고매가 아름다운 곳은 단연 산청의 남사 마을이다. 수백년 된 매화나무 고목들과 전통 한옥들, 토담과 돌담들이 잘 어울어져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리산 가는 길목의 남사마을에는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지은 전통 한옥 40여 채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 주로 최씨 고가나 이씨 고가 등 양반집의 울타리인 토담과 서민들의 울타리였던 돌담들이 두로 보존되어 있어 옛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보게 만든다. 담장의 양식만으로도 신분이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달랐던 삶의 문화가 구별되는 역사 체험을 할 수가 있다. 

남사마을 옛집의 울타리 안에는 600년이 넘은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산청 곶감의 원조가 되는 감나무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세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 1376~1453)이 일곱살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춥고 비바람이 치면 도깨비가 나와서 나무를 보호했다는 전설도 깃들어 있다. 개울 건너에는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길에 들러서 묵고 갔던 고택도 있다.

▲상족암 동굴 사이로 보이는 가족들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강제윤

<세계 3대 공룡유적지 고성 상족암>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있는 상족암은 해식애의 암벽이 겹겹이 층을 이룬 해안절벽이다. 그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돌베틀로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옷[錦衣]을 짰고 동굴 안에는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웅덩이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천하의 비경이다.

상족암이 유명세를 탄 것은 상족암 주변에서 발견된 수백 개의 공룡 발자국 때문이다. 상족암은 미국 콜로라도주,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3대 공룡유적지로 인정받고 있다. 1982년의 학술조사로 무려 2,000여 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새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11호)도 있다. 상족암(床足岩)이란 지명은 절벽 아래에 해식동굴들이 숭숭 뚫려 있어 바다에서 보면 거대한 밥상다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 주민들은 발자국이 많다 해서 ‘쌍족암(雙足岩)’ 혹은 ‘쌍발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족암(床足巖)은 소을비포(所乙非浦)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돌기둥 네 개가 있으며 바위가 평상 같다.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그 밑을 지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처에는 공룡박물관이 있는데 공룡 전신 골격 진품과 복제품, 익룡 전신 골격, 부조 화석, 일반 화석 등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