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도보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
“고독의 칠판에 ‘걷는 즐거움’이라는 메시지 전하고 싶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걷는다> 저자 올리비에 방한… 제주올레길 함께 걸어
월간산|글·박정원 부장|입력2012.12.10 20:08
사람들은 왜 걸을까?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이다. '왜 산에 오를까' 만큼 어렵기도 하다. 무슨 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가기 위해 걷는다." "발이 있기 때문에 걷는다." "목적지가 있으니 걷는다." "살기 위해 걷는다." "그냥 걷고 싶어 걷는다."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 수많은 답이 나올 수 있다.
세계적인 도보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75)가 한국에 왔다. 이번이 세 번째지만 그가 방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뉴스가 된다. 그는 세계 최초로 1만2,000㎞에 가까운 실크로드를 4년여에 걸쳐 혼자서 걸어 횡단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 나는 걷는다 > 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왜 걷는가?' 아니 '왜 실크로드를 걸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인 도보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75)가 한국에 왔다. 이번이 세 번째지만 그가 방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뉴스가 된다. 그는 세계 최초로 1만2,000㎞에 가까운 실크로드를 4년여에 걸쳐 혼자서 걸어 횡단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 나는 걷는다 > 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왜 걷는가?' 아니 '왜 실크로드를 걸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걷는 문제에 관한한 '절대 권위자'에 가까운 그를 만나기 위해 제주로 갔다. 지난 10월 30일 월드트레일컨퍼런스에 대중강연자로 참석한 그를 만났다. 그날 포함 세 차례나 조우했다. 기자들만을 위한 기자간담회에서, 대중강연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따로 메일을 보냈더니 친절하게 바로 답장을 보내줬다. 간담회와 강연은 프랑스어로 했고, 메일은 영어로 보내왔다. 간담회에서 임순정 동시통역가의 세심하고 꼼꼼한 통역으로 프랑스어가 훌륭한 우리말로 되살아났다.
걷기를 성찰과 치유의 차원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그와의 첫 만남. 170㎝ 남짓 돼 보이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인상 좋은 벽안의 베르나르씨가 제주 국제컨벤션센터(ICC) 연단 위로 올라섰다. 세계적인 도보여행가라는 강건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선가 본 듯한 캐주얼 복장에 등산화, 언제든지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런 차림이었다.
첫째 며느리가 한국인… 한국과 인연 깊어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네고는 곧장 프랑스어로 이어갔다. 그는 이번이 첫 방문이 아니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정말 한국과 인연이 있어 보였다.
그의 첫 방문은 2004년 < 나는 걷는다 > 한국어판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그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훨씬 깊어졌다. 둘째 아들이 한국의 모 방송 국제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번째 방한했다. 이어 첫째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하는 인연으로 이어져 가족이 모두 모이면 한국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된다고 전했다. 이번 한국행도 월드트레일컨퍼런스에서의 대중강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친근한 이웃집에 다녀오는 자연스런 여행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의 '걷기 이야기'로 넘어갔다. 방한기념으로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제주올레길을 걸어보니 너무 감동적이라는 인사말로 서두를 꺼냈다. "바다와 어우러진 해안 절경은 마치 조각 작품들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며 "화산절벽은 세계 유명 경매시장에 내놔도 금방 팔릴 수 있을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뒤이어 자연스레 그의 도보여행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의 첫 걷기는 초보자들에게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우리 백두대간의 몇 배나 되는 거리를 걸으려 나선 것이다. 그는 왜 그런 파격을 시도했을까.
바다와 어우러진 제주올레 절경은 조각품 같아
그는 1938년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1929년에 찾아온 세계적인 대공황은 생활을 점점 더 힘들고 궁핍하게 했다. 7남매 중에 유일하게 고교에 입학한 그는 도저히 학교를 계속 다닐 상황이 못 됐다. 결국 자퇴하고 학교생활을 끝냈다. 이후 그는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웨이터 등 온갖 굳은 일을 마다 않고 억척스럽게 생활했다. 그의 이런 생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줬고, 그 적응력은 나중에 그가 기자생활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1964년 뒤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 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CFJ(Centre Rormation des Journalistes,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를 졸업했다. 30여 년 기자생활 동안 그는 파리 마치, 르 마탱, 르 피가로 등 유수한 프랑스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경제면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베르나르는 기자생활을 마치기까지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걷기를 성찰과 치유의 차원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그와의 첫 만남. 170㎝ 남짓 돼 보이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인상 좋은 벽안의 베르나르씨가 제주 국제컨벤션센터(ICC) 연단 위로 올라섰다. 세계적인 도보여행가라는 강건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선가 본 듯한 캐주얼 복장에 등산화, 언제든지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런 차림이었다.
첫째 며느리가 한국인… 한국과 인연 깊어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네고는 곧장 프랑스어로 이어갔다. 그는 이번이 첫 방문이 아니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정말 한국과 인연이 있어 보였다.
그의 첫 방문은 2004년 < 나는 걷는다 > 한국어판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그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훨씬 깊어졌다. 둘째 아들이 한국의 모 방송 국제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번째 방한했다. 이어 첫째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하는 인연으로 이어져 가족이 모두 모이면 한국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된다고 전했다. 이번 한국행도 월드트레일컨퍼런스에서의 대중강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친근한 이웃집에 다녀오는 자연스런 여행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의 '걷기 이야기'로 넘어갔다. 방한기념으로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제주올레길을 걸어보니 너무 감동적이라는 인사말로 서두를 꺼냈다. "바다와 어우러진 해안 절경은 마치 조각 작품들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며 "화산절벽은 세계 유명 경매시장에 내놔도 금방 팔릴 수 있을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뒤이어 자연스레 그의 도보여행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의 첫 걷기는 초보자들에게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우리 백두대간의 몇 배나 되는 거리를 걸으려 나선 것이다. 그는 왜 그런 파격을 시도했을까.
바다와 어우러진 제주올레 절경은 조각품 같아
그는 1938년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1929년에 찾아온 세계적인 대공황은 생활을 점점 더 힘들고 궁핍하게 했다. 7남매 중에 유일하게 고교에 입학한 그는 도저히 학교를 계속 다닐 상황이 못 됐다. 결국 자퇴하고 학교생활을 끝냈다. 이후 그는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웨이터 등 온갖 굳은 일을 마다 않고 억척스럽게 생활했다. 그의 이런 생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줬고, 그 적응력은 나중에 그가 기자생활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1964년 뒤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 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CFJ(Centre Rormation des Journalistes,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를 졸업했다. 30여 년 기자생활 동안 그는 파리 마치, 르 마탱, 르 피가로 등 유수한 프랑스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경제면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베르나르는 기자생활을 마치기까지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때로 힘겨웠던 젊은 시절, 그리고 부러울 것 없던 성인으로서의 삶까지 아주 풍요로운 두 인생을 살았다. 당시 내 나이 예순 하나, 노년에 가까운 중년이었다. 처음엔 정치부, 나중엔 경제부 기자였던 내 직장생활은 1998년에 막을 내렸다. 인생의 세 번째 시기인 그 당시 나는 느림과 침묵에 굶주려 있었다."
그는 은퇴 뒤 극심한 우울증과 아노미에 가까운 혼란상태에 빠졌다. 결혼 뒤 25년간 같이 여행계획을 세웠던 아내와의 사별, 그리고 은퇴 뒤 찾아오는 공허함, 아들들의 독립 등은 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었다. 삶의 의미가 없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수에 그쳤다. 실제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걷는 것뿐이었다.
걷자고 작정했다. 은퇴 생활 첫해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를 선택했다. 콤포스텔라는 유럽사, 특히 기독교 역사에 길이 전하는 중요한 길이다. 노르망디에서 갈리시아(Galicia)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길 중의 하나이자 고난과 순례의 역사가 서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2,300㎞를 당나귀처럼 등에 가방 하나 메고서 출발했다. 파리를 떠날 때는 우울했지만 하루 25㎞씩 3개월을 걸은 뒤 점점 더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콤포스텔라 길의 끝에 도달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한창 걷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순간 멈췄다. 더 걸을 만한 길이 없을까 고민했다. 반짝하며 새로운 길이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인간과 문명의 길이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길인 실크로드였다. 걷기에 대한 갈증도 충분히 해결될 것 같았다. 역사는 어릴 때부터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역사적 관심과 걷는 즐거움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었다.
실크로드 통해 '역사와 걷기' 동시 해결
실크로드가 어떤 길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길이며, 당시 문명의 중심이었던 동양의 문화와 문명을 서구로 가져간, 즉 서구를 세계화시킨 길이지 않은가. 실크로드는 요즘 말로 '세계화의 길'이다. 그는 그 길을 걷기로 했다.
계획을 세웠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西安)까지 1만2,000㎞를 매년 2,500~3,000㎞를 걸음으로써 4년에 걸쳐 완성하리라 결심했다. 이스탄불과 시안은 유서 깊은 도시들이다. 이스탄불은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건설된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다시 15세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됐다.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보자면 동방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현재도 터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인구 1,300만 명의 초대형 도시다. 중국의 시안도 실크로드 당시엔 베이징보다 훨씬 경제·문화적으로 번화한 도시였다.
1년 12개월 중에 매년 서너 달 동안 3,000㎞가량 걷고, 나머지 8개월 동안은 길에 대한 역사와 지리, 문화 등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1999년 이스탄불(Istanbul)에서 테헤란(Teheran)까지 그 첫 여정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 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규격화된 문명과 온실 속 문화에는 이제 싫증이 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그리곤 짐을 쌌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 가급적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한 번 가면 서너 달이 걸리는 도보여행은 배낭 무게 줄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2.5㎏, 3㎏에 가까운 책과 지도를 포함한 자료, 티셔츠 두 벌, 반바지 하나, 양말 한 켤레, 더위에 대비한 가볍고 얇은 바지 하나, 침낭과 비상용 담요, 그 외에 주머니칼과 칫솔, 초경량 카메라 등이 들어갔다. 배낭끈을 묶기 전에 모든 물건의 무게를 면밀히 검토했다. 하지만 12㎏ 이하로 줄일 수는 없었다. 여기에 물 2리터가 담긴 수통, 그리고 빵, 치즈, 과일 등 최소한의 음식물을 추가하니 배낭 무게는 총 15㎏이 됐다. 혼자 짊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게, 15㎏의 배낭으로 출발했다.
사실 걸을 때만큼 육체적 ·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때도 없다. 사고도 자유롭다. 지적인 수행도 걸을 때가 가장 민주적이다. 걷는 동안엔 사회적 신분 차이도 없다. 남녀노소 성별 차이도 없고 누구나 동등한 상태다.
"걷기엔 특별한 비결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걷기 위해서 태어났고, 누구나 걸을 수 있다. 단지 한 가지만 강조한다면 걸을 땐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군중 속에서도 혼자 걷는 게 중요하다. 요즘은 혼자 있을 기회가 거의 없다. 샤워할 때만 빼고는 항상 누군가에 둘러싸여 있다. 인터넷,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혼자 있을 기회가 없어지고, 이동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홀로 걸을 때 신체균형을 되찾고 사고도 건전해진다."
그는 지금은 걷기가 억압당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앉아서 출근하는,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 재충전이 필요하고, 인간에 맞는 속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걷기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고, 에너지 충전 시간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레저·취미로 걷기 유행
그는 한국사회가 왜 걷기 열풍에 휩싸여 있는가에 주목했다. 지금 모든 선진국은 걷기가 유행이다. 인간은 걷기 위해 만들어져 있지만 현대사회는 지나친 속도경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에 있다.
인류 진화의 역사로 볼 때 걷기에서 시작한 이동수단은 말→자동차→비행기로 가면서 점점 더 빨라졌고, 인터넷으로 눈은 쉴 틈이 없고,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귀는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진화 결과로 다리 없는 몸통에, 눈은 지금보다 두 배나 커져 있고, 귀는 세 배나 부풀려진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한마디로 끔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곤 짐을 쌌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 가급적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한 번 가면 서너 달이 걸리는 도보여행은 배낭 무게 줄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2.5㎏, 3㎏에 가까운 책과 지도를 포함한 자료, 티셔츠 두 벌, 반바지 하나, 양말 한 켤레, 더위에 대비한 가볍고 얇은 바지 하나, 침낭과 비상용 담요, 그 외에 주머니칼과 칫솔, 초경량 카메라 등이 들어갔다. 배낭끈을 묶기 전에 모든 물건의 무게를 면밀히 검토했다. 하지만 12㎏ 이하로 줄일 수는 없었다. 여기에 물 2리터가 담긴 수통, 그리고 빵, 치즈, 과일 등 최소한의 음식물을 추가하니 배낭 무게는 총 15㎏이 됐다. 혼자 짊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게, 15㎏의 배낭으로 출발했다.
사실 걸을 때만큼 육체적 ·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때도 없다. 사고도 자유롭다. 지적인 수행도 걸을 때가 가장 민주적이다. 걷는 동안엔 사회적 신분 차이도 없다. 남녀노소 성별 차이도 없고 누구나 동등한 상태다.
"걷기엔 특별한 비결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걷기 위해서 태어났고, 누구나 걸을 수 있다. 단지 한 가지만 강조한다면 걸을 땐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군중 속에서도 혼자 걷는 게 중요하다. 요즘은 혼자 있을 기회가 거의 없다. 샤워할 때만 빼고는 항상 누군가에 둘러싸여 있다. 인터넷,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혼자 있을 기회가 없어지고, 이동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홀로 걸을 때 신체균형을 되찾고 사고도 건전해진다."
그는 지금은 걷기가 억압당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앉아서 출근하는,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 재충전이 필요하고, 인간에 맞는 속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걷기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고, 에너지 충전 시간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레저·취미로 걷기 유행
그는 한국사회가 왜 걷기 열풍에 휩싸여 있는가에 주목했다. 지금 모든 선진국은 걷기가 유행이다. 인간은 걷기 위해 만들어져 있지만 현대사회는 지나친 속도경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에 있다.
인류 진화의 역사로 볼 때 걷기에서 시작한 이동수단은 말→자동차→비행기로 가면서 점점 더 빨라졌고, 인터넷으로 눈은 쉴 틈이 없고,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귀는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진화 결과로 다리 없는 몸통에, 눈은 지금보다 두 배나 커져 있고, 귀는 세 배나 부풀려진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한마디로 끔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도 걷기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그는 강조했다. 빠른 것만 좇아가는 단계에서 느림과 비움과 침묵의 성찰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걷기의 유행은 정신 활동에 지친 현대인들이 육체적 활동으로 균형을 맞추고, 속도조절을 할 시점이 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후진국에서는 걷기가 레저나 취미활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 걷기의 중요성은 그의 경험으로 비춰 볼 때 생활에 활력을 주고 완전한 자유와 치유효과를 가져오는 측면도 있다.
비행청소년 개선 지원 '쇠이유협회' 창설
그가 실크로드 횡단에 나선 이듬해인 2000년 쇠이유(Seuil)협회를 창설했다. '쇠이유'는 소년원에 수감 중인 15~18세 청소년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3개월 동안 2,000㎞ 이상 걸으면 석방을 허가하는 교정 프로그램이다. 경계 · 문턱이라는 뜻의 쇠이유는 청소년들에게 문턱을 뛰어넘어 정상적인 사회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비행청소년은 하루에 25㎞씩 걷는 자체에 대해 처음엔 "내가 왜 걸어야 하나" 등으로 강렬한 저항과 거부를 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걷는 동안 다른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 이어진다.
프로그램을 마칠 때쯤 청소년들은 뿌듯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3번 감옥에 갔다 온 한 청소년은 "이젠 사탕 하나라도 훔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다른 청소년은 "내가 떠날 때는 건달이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영웅이 돼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쇠이유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재범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보통 수감자들의 재범률은 85%에 이른다. 그러나 걷기를 통한 프로그램을 마친 청소년의 재범률은 15%로 떨어졌다. 즉 85%가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하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이 폴란드 등 인근 국가로 전파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수없이 되풀이해서 설명을 했다.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걷는 즐거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로움. 하지만 이 설명을 명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 그는 "그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돈 때문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내 얘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애초 실크로드 1만2,000㎞를 걸으며 세운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걸어서 갈 것 ▲느리게 갈 것 ▲낯선 곳의 경치와 풍습을 요란하게 소개하는 일반적인 기행문이 아닌 오직 자신의 여정과 느낌만을 사진 한 장 없이 기록할 것 등이었다. 이 원칙은 4년 내내 철저히 지켜졌다.
후진국에서는 걷기가 레저나 취미활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 걷기의 중요성은 그의 경험으로 비춰 볼 때 생활에 활력을 주고 완전한 자유와 치유효과를 가져오는 측면도 있다.
비행청소년 개선 지원 '쇠이유협회' 창설
그가 실크로드 횡단에 나선 이듬해인 2000년 쇠이유(Seuil)협회를 창설했다. '쇠이유'는 소년원에 수감 중인 15~18세 청소년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3개월 동안 2,000㎞ 이상 걸으면 석방을 허가하는 교정 프로그램이다. 경계 · 문턱이라는 뜻의 쇠이유는 청소년들에게 문턱을 뛰어넘어 정상적인 사회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비행청소년은 하루에 25㎞씩 걷는 자체에 대해 처음엔 "내가 왜 걸어야 하나" 등으로 강렬한 저항과 거부를 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걷는 동안 다른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 이어진다.
프로그램을 마칠 때쯤 청소년들은 뿌듯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3번 감옥에 갔다 온 한 청소년은 "이젠 사탕 하나라도 훔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다른 청소년은 "내가 떠날 때는 건달이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영웅이 돼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쇠이유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재범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보통 수감자들의 재범률은 85%에 이른다. 그러나 걷기를 통한 프로그램을 마친 청소년의 재범률은 15%로 떨어졌다. 즉 85%가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하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이 폴란드 등 인근 국가로 전파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수없이 되풀이해서 설명을 했다.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걷는 즐거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로움. 하지만 이 설명을 명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 그는 "그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돈 때문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내 얘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애초 실크로드 1만2,000㎞를 걸으며 세운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걸어서 갈 것 ▲느리게 갈 것 ▲낯선 곳의 경치와 풍습을 요란하게 소개하는 일반적인 기행문이 아닌 오직 자신의 여정과 느낌만을 사진 한 장 없이 기록할 것 등이었다. 이 원칙은 4년 내내 철저히 지켜졌다.
그의 여행은 그가 세운 원칙대로 비움의 철학, 느림의 철학, 그리고 침묵의 철학으로 점철되어 있다. 달팽이 같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생각하면서 텅 빈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걸어가다 보면 어느 덧 새로운 세상이 가슴속에 담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훨씬 여유 있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밝혔다.
"1~2년 내 걷기에 관한 소설도 출간할 것이며, 앞으로 걸을 땐 여자친구와 같이 갈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서로가 침묵을 지키며, 독립된 두 인간이 걷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으며, 그 여자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기다리는 고독, 나는 과연 그 심연과 맞서 싸워 달콤함을 음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지닌 모든 이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독이 도피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고독이 칠판이라면 난 그 위에 계속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리가 움직이는 한 계속 걸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걷는 즐거움과 기쁨, 혼자 걷는 즐거움을 꼭 전하고 싶다."
벽안의 '걷기 달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한국의 독자와 도보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 나는 걷는다 > 나오기까지, 그리고 어떤 책인가?
이스탄불~시안 간 대자연과 인간의 소통·교감 그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은퇴 후 발간한 첫 책이 총 3권으로 이루어진 < 나는 걷는다 > (효형출판사 2003년刊)이다. 프랑스어 원제는 < Longue Marche > . 우리말로는 '대장정' 정도 되겠다. 그런데 < 나는 걷는다 > 라는 원제와 전혀 다른 제목으로 발간됐다. 효형출판사는 "내부 회의를 거친 뒤 내용과 잘 어울리고 국내 정서에 부합하도록 바꿨다"고 밝혔다. 이 바뀐 제목이 한국에서는 당시 걷기열풍이 막 일려던 시기와 맞아떨어져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프랑스에서 40만 권 이상 팔리고 세계 9개 언어로 번역돼 나간 이 책은 국내서도 2012년 11월 현재까지 1권 16쇄, 2권 14쇄, 3권 12쇄 등 총 5만 부가량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과 그림 한 장 없이 텍스트로만 발간된 기행에세이 치고는 상당히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셈이다.
그는 훨씬 여유 있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밝혔다.
"1~2년 내 걷기에 관한 소설도 출간할 것이며, 앞으로 걸을 땐 여자친구와 같이 갈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서로가 침묵을 지키며, 독립된 두 인간이 걷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으며, 그 여자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기다리는 고독, 나는 과연 그 심연과 맞서 싸워 달콤함을 음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지닌 모든 이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독이 도피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고독이 칠판이라면 난 그 위에 계속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리가 움직이는 한 계속 걸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걷는 즐거움과 기쁨, 혼자 걷는 즐거움을 꼭 전하고 싶다."
벽안의 '걷기 달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한국의 독자와 도보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 나는 걷는다 > 나오기까지, 그리고 어떤 책인가?
이스탄불~시안 간 대자연과 인간의 소통·교감 그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은퇴 후 발간한 첫 책이 총 3권으로 이루어진 < 나는 걷는다 > (효형출판사 2003년刊)이다. 프랑스어 원제는 < Longue Marche > . 우리말로는 '대장정' 정도 되겠다. 그런데 < 나는 걷는다 > 라는 원제와 전혀 다른 제목으로 발간됐다. 효형출판사는 "내부 회의를 거친 뒤 내용과 잘 어울리고 국내 정서에 부합하도록 바꿨다"고 밝혔다. 이 바뀐 제목이 한국에서는 당시 걷기열풍이 막 일려던 시기와 맞아떨어져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프랑스에서 40만 권 이상 팔리고 세계 9개 언어로 번역돼 나간 이 책은 국내서도 2012년 11월 현재까지 1권 16쇄, 2권 14쇄, 3권 12쇄 등 총 5만 부가량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과 그림 한 장 없이 텍스트로만 발간된 기행에세이 치고는 상당히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셈이다.
효형출판사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걷기를 준비하는, 즉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과 은퇴한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주요 독자층은 40대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베르나르는 실크로드 대장정을 떠나기 전 상당한 자료조사와 준비를 끝낸 뒤 프랑스 출판사 3곳에 책 발간계획에 대해 장문의 편지를 팩스로 보냈다. 모두 반응을 보이기는 했다. 한 곳은 "은퇴 기자가 그런 책을 쓴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열심히 잘 해보기를 바란다"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답이 왔다. 더 이상 추진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출판사는 "흥미로운데 우리한테는 맞지 않은 것 같다. 4년 후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을 했다. 4년 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출판사는 "지금 한번 만나 봅시다"며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도대체 왜 지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를 걸으려고 하나? 책 써본 적이 있느냐?" 등의 질문으로 관심을 보였다. "나는 한 권이 아니라 세 권을 쓸 계획이다. 여태 책 쓴 적은 없다. 기사도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내용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15일 뒤에 떠날 계획이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내부 회의를 거친 뒤 계약서 쓰고 수표 1장을 줬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수표를 받고도 미심쩍어 '내가 보낸 글이 선택되는 순간 수표를 사용하자'며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실제로 걸으면서 그런 거금은 사용할 일도 없었다.
그는 기록을 위해서 왼쪽 포켓에 여권, 오른쪽엔 수첩과 펜, 바로 그 아래 포켓엔 카메라 등을 넣어둬, 언제든지 사진을 찍고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남겼다. 누군가를 만나면 바로 이름부터 적었다. 4년 동안 1만5,000명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 엄청난 기록이 남겨졌다. 그는 "책 3권을 쓰는 데 내가 메모한 것의 5%도 채 활용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기록습관은 기자생활을 통해서 얻어졌다고 덧붙였다.
그 기록은 책 내용 곳곳에 나온다. 사진 한 장 없는 책에서 사진 대용으로 주변 상황이 아주 상세히 묘사돼 있다. 길을 잃어 헤맸던 얘기, 이슬람 집 구조가 어떻고, 세금은 언제 어떻게 내는지, 그가 방문한 장소 모두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 언어, 생활습관, 주변 숲 등까지 기술하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 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줏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도 여행기는 보통 4,000~5,000권 정도 팔리면 성공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무려 40만 권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다. 그 돈은 전부 비행청소년을 지원하는 쇠이유협회 후원금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총 3권에 담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권은 '아나톨리아 횡단'이라는 주제로 실크로드 대장정을 떠나기까지의 결심과 이스탄불에서 이란의 수도 테헤란까지 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리고 걷기에 대한 열정에 취해 쉼 없이 전진하다가 너무 무리해서 병원으로 실려가는 안타까운 사연도 전하고 있다.
베르나르는 실크로드 대장정을 떠나기 전 상당한 자료조사와 준비를 끝낸 뒤 프랑스 출판사 3곳에 책 발간계획에 대해 장문의 편지를 팩스로 보냈다. 모두 반응을 보이기는 했다. 한 곳은 "은퇴 기자가 그런 책을 쓴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열심히 잘 해보기를 바란다"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답이 왔다. 더 이상 추진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출판사는 "흥미로운데 우리한테는 맞지 않은 것 같다. 4년 후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을 했다. 4년 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출판사는 "지금 한번 만나 봅시다"며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도대체 왜 지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를 걸으려고 하나? 책 써본 적이 있느냐?" 등의 질문으로 관심을 보였다. "나는 한 권이 아니라 세 권을 쓸 계획이다. 여태 책 쓴 적은 없다. 기사도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내용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15일 뒤에 떠날 계획이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내부 회의를 거친 뒤 계약서 쓰고 수표 1장을 줬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수표를 받고도 미심쩍어 '내가 보낸 글이 선택되는 순간 수표를 사용하자'며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실제로 걸으면서 그런 거금은 사용할 일도 없었다.
그는 기록을 위해서 왼쪽 포켓에 여권, 오른쪽엔 수첩과 펜, 바로 그 아래 포켓엔 카메라 등을 넣어둬, 언제든지 사진을 찍고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남겼다. 누군가를 만나면 바로 이름부터 적었다. 4년 동안 1만5,000명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 엄청난 기록이 남겨졌다. 그는 "책 3권을 쓰는 데 내가 메모한 것의 5%도 채 활용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기록습관은 기자생활을 통해서 얻어졌다고 덧붙였다.
그 기록은 책 내용 곳곳에 나온다. 사진 한 장 없는 책에서 사진 대용으로 주변 상황이 아주 상세히 묘사돼 있다. 길을 잃어 헤맸던 얘기, 이슬람 집 구조가 어떻고, 세금은 언제 어떻게 내는지, 그가 방문한 장소 모두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 언어, 생활습관, 주변 숲 등까지 기술하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 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줏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도 여행기는 보통 4,000~5,000권 정도 팔리면 성공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무려 40만 권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다. 그 돈은 전부 비행청소년을 지원하는 쇠이유협회 후원금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총 3권에 담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권은 '아나톨리아 횡단'이라는 주제로 실크로드 대장정을 떠나기까지의 결심과 이스탄불에서 이란의 수도 테헤란까지 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리고 걷기에 대한 열정에 취해 쉼 없이 전진하다가 너무 무리해서 병원으로 실려가는 안타까운 사연도 전하고 있다.
2권은 '머나먼 사마르칸트'란 주제로 기술하고 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2000년 봄 다시 중단된 여정을 시작한다. 타브리즈, 테헤란, 네이샤부르 등 이란의 주요 도시를 거쳐, 7월에는 불 타는 카라쿰사막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사막과 이슬람 지역의 종교적 열기를 재치 넘치는 상황과 놀라운 기지로 헤쳐 나가고 있다.
3권은 '스텝에 부는 바람'이란 주제로, 실크로드의 마지막 구간에서 눈 덮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에서 아직까지 천일야화 시대와 같은 생활을 볼 수 있는 도시 카스를 거친다. 끝없이 이어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을 여행하며 지쳐가지만 여행의 의미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2002년 여름 마침내 실크로드의 끝에 도착하는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베르나르는 "나의 책 전 부분에 사랑과 고독, 걷기가 담겨 있다"며 "그것을 한 부분, 한 부분 뽑아내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3권은 '스텝에 부는 바람'이란 주제로, 실크로드의 마지막 구간에서 눈 덮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에서 아직까지 천일야화 시대와 같은 생활을 볼 수 있는 도시 카스를 거친다. 끝없이 이어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을 여행하며 지쳐가지만 여행의 의미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2002년 여름 마침내 실크로드의 끝에 도착하는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베르나르는 "나의 책 전 부분에 사랑과 고독, 걷기가 담겨 있다"며 "그것을 한 부분, 한 부분 뽑아내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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