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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801]헌재 白松/이현종 논설위원/문화일보/2017.03.07

시온백향목 2017. 3. 23. 19:27

 서울 재동(齋洞)에 있는 헌법재판소에 취재차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재판소 건물 뒤뜰 축대 위에 있는 600여 년 된 재동 백송(白松)’이다.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이 백송은 소나무가 흰빛을 가진 특이함도 있지만 승리의 브이(V)자 모양의 자태가 독특하다. 두 마리의 백룡(白龍)이 꿈틀대며 승천할 것 같은 기상이 느껴져 볼 때마다 힘을 받는다. 헌법재판관들이나 직원들도 점심 식사 후 꼭 이곳을 들러 산책하면서 백송의 고귀한 자태처럼 헌법의 존엄과 숭고함을 되새긴다고 한다.


 재동 백송이 같은 수종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다는 점도 있지만 역사성을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원래 백송은 우리나라 나무가 아니라 중국 나무로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들이 가져와 심었는데, 백송이 있는 집안은 그만큼 세도가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헌재가 있는 재동은 원래 잿골(회동·灰洞)로 불렀는데 조선 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을 찾아가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김종서 집 일대에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를 가져다 뿌렸는데 그 일로 잿골이라고 불리다가 한자로 정리하면서 현재의 재동이 됐다. 백송이 어린 나이에 이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 씨의 세도를 끝내고 왕정을 복고하려고 할 때 백송의 둥치가 전보다 더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성공을 자신했다고 한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개화파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이 이 백송을 뜰에 두었고 이후 홍영식이 대역죄로 처형된 뒤 이 집은 광혜원·제중원으로 사용되면서 근대 의학의 출발지가 됐다. 이후에는 대한제국이 매입해 관사로 쓰다가 경기여고와 창덕여고를 거쳐 1993년 이 터에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조선과 근대사의 주요 장면을 목격한 백송은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동성동본 금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행정수도 특별법 등의 심판을 보면서 현대사의 중심에도 서 있다.


 며칠 뒤면 백송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결과도 보게 된다. 매일 벌어지는 탄핵 찬반 시위의 소음도 참아가며 재판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을지 궁금하다.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백송 앞에서는 마음을 내비치지 않을까. 그러나 백송의 ‘V’가 누구의 승리를 예고하는 징표인지 아직 재판관들도 모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