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전후 중학교 때 김동리(1913∼1995)의 소설 ‘무녀도’를 읽었다. 굿을 하던 무당 모화가 저수지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서늘한 장면이 아스라하다. 김동리를 다시 떠올리게 한 사람은 태극기 집회와 헌법재판소에서 험변(險辯)을 쏟아낸 아들 김평우(72) 변호사다. 처음엔 두 부자의 이념 성향을 연결짓지 못했다. 그저 대한변호사협회장(제45대)까지 지낸 분이 거친 언사를 쓰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1941~2003)가 ‘문학적 아버지’ 김동리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 떠올랐다. 옛 신문들을 찾아봤다.
1935년 단편 ‘화랑의 후예’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김동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반공주의를 표방한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 뒤 순수 문학을 고집하며 줄곧 보수 우익의 길을 걷는다. 이문구의 가족사는 참혹했다. 좌익 활동을 이유로 6·25 때 아버지를 잃었고 두 형도 ‘빨갱이 자식’으로 죽음을 맞았다. 김동리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1년 작가의 꿈을 안고 입학한 이문구의 독특한 문장과 문체를 각별히 아꼈다. 학기말 시험에 이문구의 습작소설을 논하라는 문제를 낼 정도였다.
이문구는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친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1987)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현실 참여에 앞장선 민족문학작가회의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문학적 아버지’를 냉혹하게 비판하자 탈퇴해 버린다. 김동리는 1988년 8월 29일 보수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축사를 하면서 구속 문인 석방 운동을 비난해 반발을 샀다. 이문구는 1995년 김동리가 타계한 뒤 김동리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김동리 문학상까지 제정했다. 너른 품이 새삼 돋보인다. 소설가 박상륭(77)은 2003년 위암으로 숨진 이문구의 빈소에서 ‘군자’ ‘대인’으로 회고했다.
김동리의 제자이자 30년 연하 셋째 부인인 소설가 서영은(74)도 태극기 집회에 적극적이다. 김평우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제49대 대한변호사협회장 김현(61) 변호사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고문을 지낸 시인 김규동(1925∼2011)이 부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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