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387>그이 얼굴

시온백향목 2016. 10. 29. 15:30

그이 얼굴 김연희(1981)

   

 

돈이 없어서 힘들었다

맛있는 거 못 사 먹고

기저귀도 못 사고

 

갑자기 똑 떨어지니 어떡해

이럴 줄 몰랐는데 어떡해

 

난 몰라

난 몰라

생기겠지

생기겠지?

 

저녁에 해지고

애들이랑 구루마* 끌고 온 그이 마중

문 앞에서 그이가 웃는다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돈 많이 벌었어

십만 원 가까이 벌었다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

기저귀도 사고.

 

* 내 남편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를 끌고

홍대 앞을 다니며 음반과 책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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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젊은 여자지만 어린애가 딸렸으니 일거리를 찾기 힘들 테다. 젊은 남자일 화자 남편도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난 몰라/난 몰라’, 화자는 속수무책으로 애를 태운다. 아기 기저귀도 떨어져가고 어쩌면 쌀도 간당간당하고. 지난 세기의 60년대나 70년대 얘기가 아니다. ‘삼포세대남녀가 부잣집 자식도 아니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지 않아 처한 작금의 현실이다. ‘생기겠지/생기겠지?’, 문 앞에서 작은애를 업고 큰애의 손을 잡고 일 나간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늦저녁. 다행히 그이가 웃는단다! 힘없고 쓸쓸한 웃음이 아니라 활짝 갠 웃음일 테다. 빤한 살림을 모를 리 없는 남자도 온종일 속이 탔겠지. ‘돈 많이 벌었어/십 만원 가까이 벌었다’! 의기양양한 남편의 보고에 아내 얼굴이 환해졌겠지. 애들도 영문 모르며 까르륵거렸겠지.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고맙고 안쓰러운 내 남편, 애들 아빠!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기저귀도 사고’, 당분간의 다행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박한 기쁨을 만끽하는 화자다.

 

내가 알기로 김연희는 일반적인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인이다. 삶을 섬세한 촉수로 더듬는 자세를 잃지 않고 살려는 이가, 그 일상을 일기 쓰듯 시로 써서 그게 모이면 혼자 작은 시집으로 내는, 말하자면 재야시인이다. 이 시는 2년 만에 낸 그의 두 번째 시집 작은 시집에서 옮겼다. 쉽고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다듬은 시들에서 편편이 전해지는 시인의 여리고 따뜻하면서도 견결한 심성이 독자를 기어이 정들고 편들게 만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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