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392>희망촌 1길

시온백향목 2016. 10. 22. 11:06

희망촌 1 임형신(1948)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희망촌이 있다 상계4동 배수지 아래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산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기울어진 담벼락에 나팔꽃 씩씩거리며 올라간다

사금파리에 찔린 청도라지

독기를 뿜고 웃자라는

한 뼘의 마당

대낮은

텅 비어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겨우살이풀처럼 늘어져 있는 할머니들 등 뒤 며느리밥풀꽃도 기웃거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오늘 또 무엇이 들어와서

어떤 희망 한 줌

뿌리고 가려나

 

----------------------------------------------------------------------------------------

 

은빛 잎사귀들이 파르르 나부끼는 은사시나무 숲 아래에 작은 집들 올망졸망한 언덕. 버스 타고 지나가다 차창 너머로 보았다면 정감어린 동네라 느낄 수도 있을 테다. 어디서 보는가, 누가 보는가. 동네 내력을 잘 아는 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을 고샅고샅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척박하다.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곤고하나마 생활을 꾸려 나가게 해주던 일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교회와 절. 세상에 기댈 데 없는 사람들, 더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들 곳은 신의 가슴뿐이라는 걸까.

 

종종 종교는 무지와 절망을 먹고 크는 듯하다.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사는’ ‘희망촌 1’. 동네나 집 이름에 희망’ ‘햇살’ ‘별빛같은 이름이 붙으면 슬프다. 실상은 그 정반대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어린이처럼 무구한 꿈을 실낱처럼 붙들고 있는 이름. 주민들이 다른 동네로 밥벌이 나가 대낮은/텅 비어 있는 희망촌 1,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세밀하고 적확한 사실적 묘사로 현실과 풍경을 꿰어내는 시인의 힘!

 

황인숙 시인


*단청 (丹靑) [명사] 
1. <건설> 옛날식 집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림. 또는 그 그림이나 무늬. 
2. [같은 말] 채색2(彩色)(1. 여러 가지의 고운 빛깔). 


'시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390>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0) 2016.10.26
<391>봄, 소주  (0) 2016.10.25
<393>월요시장  (0) 2016.10.21
<394>달걀  (0) 2016.10.20
<395>묵매  (0) 2016.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