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이 ‘천만 관객’ 고지를 찍었다. 부산행 KTX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로 변한 사람들과의 처절한 사투, 생존본능의 추악한 민낯을 그린 연상호 감독 작품이다. 칸 영화제 중에서도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장르 영화만 초대하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서 기립박수를 받아 기대를 모으기는 했다. 하지만 한국 관객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는 좀비물이 대박을 터뜨린 것은 이례적이다.
‘살아있는 시체’로 등장하는 좀비(zombie)는 카리브 해 지역의 전통 종교인 부두교에서 나온 개념이다. 부두교 사제는 멀쩡한 사람을 가사(假死) 상태의 좀비로 만들어 부려먹는다고 한다. 대중문화로 좀비가 들어온 것은 1968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좀비영화의 전범이 된 이 영화에서 좀비는 살아있는 사람을 물고, 뇌를 파괴해야만 동작을 멈추고, 그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로 변한다. 이 뻔한 패턴을 반복하는 좀비영화가 그토록 많이 나오는 이유는 좀비가 현대인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행’의 성공 요인도 공포와 불안의 한국적 현실을 적절하게 녹여낸 데 있다. 직장 때문에 가정에 소홀한 가장, 수익이 난다면 ‘작전’도 서슴지 않는 펀드매니저, “공부를 못하면 저 사람(노숙인)처럼 된다”고 어린이에게 충고하는 어른. 극한 상황 속에서 양식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람은 어린이와 청소년뿐, 대다수 어른은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는다.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대사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영화는 죽음과 직면한 상황에서 누가 최후까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를 묻지만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우회적 비판도 담고 있다. 좀비 출현을 ‘폭동’이라고 발표하고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라”고 되뇌는 정부는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 무능하게 대처한 정부를 연상시킨다.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돌아다니는 게 좀비다. 수명을 다하고도 살아있는 척하는 존재가 어디 영화 속 좀비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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