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그분이 ―사포(기원전 625년 무렵∼기원전 570년 무렵)
내게는 그분이 마치 신처럼 여겨진다.
당신의 눈앞에 앉아서
얌전한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그 남자분은.
당신의 애정 어린 웃음소리에도
그것이 나였다면 심장이 고동치리라.
얼핏 당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목소리는 잠겨 말 나오지 않고
혀는 가만히 정지된 채 즉시
살갗 밑으로 불길이 달려 퍼지고
눈에 비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귀는 멍멍하고
차디찬 땀이 흘러내릴 뿐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할 뿐
풀보다 창백해진 내 모습이란 마치
숨져 죽어버린 사람 같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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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앞에 앉아서/얌전한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치 신처럼 여겨진다’니 얼마나 대단한 존재감의 ‘당신’이란 말인가! 지금 첫눈에 반한 것인지, 이전부터 반해왔던 것인지 몰라도 화자는 ‘당신’에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한 사랑을 품고 있다. ‘당신’의 웃음소리, 그 ‘애정 어린 웃음소리’가 나를 향한 것이었으면! ‘당신’의 데이트 상대인 ‘그 남자분’의 자리에 자기를 놓는 상상만으로도 화자는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목이 잠기고, ‘살갗 밑으로 불길이 달려 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차디찬 땀이 흘러내’리고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하는 게, 죽을 것만 같단다. ‘얼핏’ ‘바라보기만 해도’ 이렇다니 화자가 성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당신’은 치명적 매력을 풍기는 여인인가 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을 훔쳐보기나 하는 심정이라니 오죽 아릴까. 화자의 훔쳐보기를 훔쳐보는 독자에게까지 감각 이입이 되게 몸의 사랑의 격정적인 감각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
사포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여성 시인이다.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이라는 말은 동성애자로도 알려진 그의 고향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플라톤이 ‘열 번째 뮤즈’라 칭했다는 사포는 수많은 시를 썼으나, 중세에 ‘음탕하다’는 이유로 불태워져서 거의 소실됐다. 이 시는 고대의 문예비평가 롱기노스가 그의 작품 ‘숭고에 관하여’라는 글에 인용한 덕에 일부가 전해진 것이라고, 시선집 ‘세계의 명시’에 편저자 김희보가 썼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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