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박봉우(1934∼1990)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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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다가 한 흑백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누더기 옷에 보퉁이를 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라는 글이 달려 있다. 아, 육이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커튼을 내리고 불을 꺼서 캄캄한 교실,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빗발치는 포화며 울부짖는 피란민들이며 그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며 기차를 숨죽이고 보던, 1960년대 초등학생 적 기억이 떠오른다. 전쟁에 대한 공포가 가슴을 가득 메웠더랬다. 대부분 사람이 죄 없이 영문 모르게 터지는 전쟁. 어린아이나 동물은 전쟁의 비참을 더 가혹하게 겪는다.
휴전선에서 다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이라며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을 예상하고 진저리치는 이 시는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진물이 흐르는 1956년에 발표됐다. ‘시방의 자리’ 휴전선이 일촉즉발로 여겨지던 때. 세월이 흘러 많은 한국인의 전쟁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삶이 화사해졌지만, 시인 박봉우는 끝내 그 상흔을 벗지 못했다. 민족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보다 앞에 뒀던 시인은 술과 가난의 나날을 보냈다 한다. 이제 ‘시방의 자리’가 일촉즉발로는 여겨지지 않지만, 여전히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인 휴전선.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가면 이 시를 새긴 시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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