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스크랩] 김장환 목사의 은인 칼 파워스 미군 상사 별세

시온백향목 2013. 9. 28. 19:06

 

 

 

 

 

김장환 목사의 은인

칼 파워스 미군 상사 별세

 

 

칼 파워스 상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침례교 세계연맹 총회장도 될 수 없었다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가 평생의 은인으로 섬겼던 625 참전 미군 상사 칼 파워스(Karl Powers)씨가 85세를 일기로 921(, 현지 시간) 영면했다.

 

칼 파워스씨는 625 전쟁 당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온 어린 김 목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미국으로 보내어 명문사립 밥존스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이어 대학교,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헌신했다.

 

 

 

 

김장환 목사의 은인 故칼 파워스 씨

 

 

 

이 전쟁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건져내고 싶어. 빌리, 미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아팔레치아 산맥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칼 파워스씨는 가난했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이후 자신은 좋은 사립대학 입학을 포기하면서 김 목사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혼기를 놓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김 목사는 칼 파워스씨의 사랑과 헌신을 기리고자 201010PK(PowersP, KimK)장학재단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있다. 칼 파워스씨의 장례예배는 현지에서 25() 드린다.

 

 

故칼 파워스와 김장환 목사

 

미군들을 따라 경산에 도착한 장환은 정식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되었다. 경산에는 4개의 막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막사에서 20명의 시중을 들었다. 군인들은 장환에게 빌리라는 미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느 날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장환에게 낯선 미군이 다가왔다. 다른 막사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칼 파워스 상사였다. 그는 1950년 여름 한국에 왔다. 당시 22세였던 파워스 상사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 때 그는 단 한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옆 막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장환을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하자 배움에 목말라있던 장환은 선뜩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칼 파워스 상사가 전방으로 이동하게 되자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미국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없이 귀국한 미군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칼 파워스 상사는 이미 제대 명령이 떨어졌지만 장환을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여섯 차례나 근무를 연장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가 문교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에게 탄원도 하고 진정서도 제출해 가까스로 비자를 받았다. 장환의 비자가 나오자 파워스 상사는 408달러짜리 배표를 마련해 주었다.

 

이근미,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나의 설교예화 베스트] 김요셉 목사, <아버지의 은인 파워스 상사> 국민일보 2007.3.11

 

 

 

예수님의 조건없는 사랑은 제자들을 변화시켰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칼 파워스씨의 사랑과 섬김도 이와 닮았다. 조건없는 사랑이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를 키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듯, 우리의 사랑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신사옥 건축 모금을 중단하고 진행한 시리아 난민 돕기와 국내 외 어려운 학생들의 학업을 돕는 <PK장학재단>또한 받은 사랑을 다시금 돌려주어 제2, 제3의 세계적 영적지도자를 세우고 있다.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작은 사랑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으로 다가가기를 기대한다.

 

 

출처 : FEBC Weekly News
글쓴이 : FEBC(극동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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