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가요

[스크랩] 박인희 - 세월이 가면

시온백향목 2011. 6. 24. 02:27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한국 전쟁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이 詩에 대하여 강계순(姜桂淳, 1937년생)은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168~171)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 성당 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길을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묻어나는 낡은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 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 '은성'으로 향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씨는 한국전쟁 직후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란 주점을 운영했다.

지금의 유네스코회관 건물 맞은편 자리이다.

통나무 의자에 사기그릇 대폿잔, 담배연기로 꽉 찼던 이곳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1956년 이른 봄 저녁이었다.

은성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도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리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길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 년이 넘도록 가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나서 한동안 흥분으로 세월을 보냈다.
부지런히 원고도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살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는 임궁재 등과 함께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 완성 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가지고

당시 단성사에서 상영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케서린 햅번' 주연의 '여정'을보고 싶었으나

 주머니가 비어 못 보고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술집에 앉아 불렀다.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에게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박인환은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31세의 아까운 인생을 마감했다.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도 못 찾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지 못하여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감겨주었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못 사주었다면서

김은성이 조니워커 한 병을 죽어 누워 있는 박인환의 입에 부었고 다들 울었다.
그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후배들이 따랐고 공동묘지까지 따라 온 친구 정영교가

카멜담배와 조니워커를 그의 관 위에 부어 주었다.
모윤숙 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송 하였고 친구인 조병화 시인이 조시를 읽었다.
 
"인환이 너 가는구나
대답이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있는 시를 쓰고..."

 

 

▲ 박인환, 이진섭, 유두연, 박태진 (오른쪽부터·1955)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후쯤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세상 떠나기 3일 전인 3월 17일에 천재 시인 이상(李箱·본명 김해경·1910~1937)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 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 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빈 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됐다고 보는 것 같다.

세상 떠나던 그 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밤 8시30분쯤 집에 들어온 후에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생명수(활명수 같은 것)를 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9시경 숨을 거뒀다.

 

그의 아들 박세형은 20년 후인 1976년 아버지 박인환의 시들을 모아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를 내면서 후기에 선친의 사인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아버지께서 타계하신지 오래 되어 사인(死因) 등에 관하여

궁금해 하시는 독자가 계실 것 같아 이 기회를 빌어 말씀해 둔다.

아버지께선 평소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친구분들과 함께 명동에서 약주를 드신 후 귀가,

심장마비로 별안간 돌아가셨다. 1956년 3월 20일 밤 9시 경이었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태생이다.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용모였다.

6·25 전쟁때는 경향신문 종군기자였고, 그 후 대한해운공사에서도 일했다.

친구와 영화와 스카치 위스키인 조니 워커를 좋아했다.

“장례식 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따랐고

그의 관 속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 주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 강계순, 문학예술사, 1983)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엔 없고,

앞에 언급한 사후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에 실려있다.

노래 ‘세월이 가면’과 관련해 수필가 조순제씨가 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제목의 눈물겨운 수필이 있어 여기에 간추려 소개한다.

 

1950년대 후반 박인환 작시의 노래 ‘세월이 가면’을 언제나 흥얼거리던 J라는 공군 파일럿이 있었다.

생기기도 박인환처럼 훤칠한 미남이었다. 언제나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미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열흘 앞둔 어느 날 엔진 수리가 끝난 비행기에 평소 친절을 베풀며

가깝게 접근해 왔던 인접 부대 모 중위를 탑승시켜 시험비행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인접부대 중위가 비행기 뒷좌석에서 이 파일럿을 위협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떻게 위협을 당했는지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그 후 북한 방송에서 모 중위는 의거 귀순했다고 영웅처럼 떠들었는데, J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J씨의 약혼녀는 데보라카를 연상시키는 미모였다.

이 사건 후 그녀는 초혼도 재혼도 실패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수필가 조순제씨가 80세가 다 되어

요양병원 정신신경과에 입원해 있는 이 여성을 방문했는데,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과거 약혼자의 친구였던 조씨를 보자 그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곤 조용히 창문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가족들이 50년이 지나(근년의 일인 것 같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 명단에 J씨를 올렸으나

북으로부터 병사했다는 단답 밖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고 한다.

읽으면서 기분이 울적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운명의 이야기다.

그 노래 ‘세월이 가면’.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러온 노래였을까.

우리는 오늘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깊은 분단의 상처들을 이처럼 목격하고 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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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인의 파라다이스
글쓴이 : 다정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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