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이 1936년 등단 뒤 1941년 펴낸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에 담았던 ‘자화상(自畵像)’ 한 대목이다. 마지막은 이렇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그의 절창(絶唱)은 이 밖에도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어이할거나/ 아 나는 어이할거나/ 남몰래 혼자 사랑을 가졌어라’ 하는 ‘신록(新綠)’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다시 오진 못 하는 파촉(巴蜀) 삼만리’하는 ‘귀촉도(歸蜀途)’도 그중 일부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하는 시 ‘동천(冬天)’도,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넌출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하는 시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푸르른 날’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학(鶴)’ ‘질마재 신화’ ‘국화 옆에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등도 ‘영원한 문학청년’ ‘당대 최고의 문장가’ ‘한국인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 ‘한국 대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미당전집간행위원회는 그가 남긴 산문(散文) 대부분을 모은 책 ‘떠돌이의 글’ ‘안 잊히는 사람들’ ‘풍류의 시간’ ‘나의 시’ 등 4권을 최근 발간했다. 시 ‘동천’은 마흔 넘어 한 여인에게 품었던 연정(戀情)을 승화한 것이라고 진솔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20권으로 계획된 전집 중에 아직 나오지 않은 9권도 오래지 않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의 부끄러운 실상엔 눈을 감은 채 위선(僞善)을 일삼는 권력층과 지식인이 널려 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자화상’을 새삼 많은 사람이 되새기기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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