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369>우포여자

시온백향목 2016. 11. 14. 17:17

우포 여자 권갑하(1958)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

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잔 본적이 없다

비취빛 그리움마저 개구리밥에 묻어버린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마음도 어쩌지 못할 원시의 촉촉함이여

생살 찢고 솟아오르는 가시연 붉은 꽃대

나이마저 잊어버린 침잠의 세월이래도

말조개 뽀글거리고 장구애비 헐떡인다

누가 알리 저 늪 속 같은 여자의 마음

물옥잠 생이가래 물풀 마름 드렁허리

제 안을 정화시켜온 눈물 보기나 했으리

칠십만 평 우포 여자는 오늘도 순산이다

쇠물닭 홰 친 자리 물병아리 쏟아지고

안개빛 자궁 속으로 삿대 젓는 목선 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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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일대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습지 우포늪을 의인화해서 다섯 수 연시조(聯詩調)로 그린 작품이다. 한 수 기본이 36구라지. 시조를 잘 모르는 나, 독자가 오종종하게 일단 그것을 짚어 보니 딱 들어맞는다. 시조는 정형시다. 벗어나면 안 되는 틀은 시상을 펼치는 데 구속이 될 것 같은데, 권갑하에게는 그 틀이 때로는 깔아놓은 멍석이요, 때로는 중심을 잡아줘 더 자유로이 몸을 띄울 수 있게 하는 기둥이다. 시조의 형태라는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그는 어떤 소재건 유유히 다룬다. 각고의 훈련으로 숙달된 형식은 더이상 그의 발목을 잡지 않을 테다. 세상만사에 얼마든지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이 이끌리고 상상력을 펼칠 수 있을 테다. 이 시조가 실린 시조선집 누이 감자는 우리 생활 속에 시조를 신선하게 들여놓는다.

 

호방한 자연은 보는 이를 호방하게 만든다.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성인 남녀라면 알아들을 이라는 은유를 써 화자는 호방하게 뇐다.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원시의 촉촉함을 지닌 이 풍만한 여자! ‘칠십만 평이란다. 거기서 가시연 붉은 꽃대는 생살 찢고 솟아오르, ‘말조개 뽀글거리고 장구애비 헐떡인단다. 한 여인이 끓어 넘치는 성적 에너지로 제가 품은 생명의 씨앗을 싹 틔워 쏟아내는 마지막 풍경이 남자들의 관능적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듯하다.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자는 본적이 없다’, 본적(本籍)이 없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는 뜻일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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